우정의 글/우정 시선

제천역

BK(우정) 2021. 6. 16. 05:42

 

 

제천역

 

동막에서 한참을 걸어나와

버스를 타고 도착한 역

문명을 모르고 자란 상고머리가

멀리 서울로 가는 기차, 창가에서

창 밖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결연한 얼굴로 서 계셨다

 

어머니는 몸집보다 큰 고추 포대를

이리 저리 옮기셨다

서울로 가면

생활의 밑천이 되고

더러는 담임에게 촌지로 건네던

부푼 고추 포대들이

부푼 불안감마냥 기차에서 뒹굴었다

 

검은 교복의 시절, 방학이 되면

청량리발 제천행 기차를 탔다

한 학기의 생활은

성적표 숫자와 담임의 글 한 줄에

혹독하게 요약이 되어 있었다

제천역에서 양화리로 들어가는 버스

내 생각은 버스처럼 흔들렸다

 

결국, 고교 1년을 쉬었다

자전거를 타는 중학교 국어선생

그 꿈은 멀리 밀쳐졌고

나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학생도 아닌, 일반인도 아닌

고교 휴학생은 거리낌없이

동막으로 가는 성황당 고개를 넘었다

 

 

 

출장길, 제천역에 들른 날

넓게 둘러본 역에는

청량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철길들도 있었다

안동역, 대전역, 강릉역..

알고는 있었지만

떠나지 못하였던 철길

왜 청량리역만을 향하였을까

 

청량리역에서 제천행을 탄다

노부모를 만나러 가는 길

기차는 남한강을 지나 치악을 넘는다

아버지의 굽은 어깨

어머니의 생활이 숨 쉬는 곳

돌아가고플 때나 떠나고플 때나

제천역은 그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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