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일상의 상식

가을, 과일도 저마다 물이 듭니다

BK(우정) 2020. 10. 23. 05:49

드높은 하늘, 선선한 바람을 품은 가을은 과일이 풍성한 계절이다. 수확을 앞둔 과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싱그러운 초록색 풋사과는 빨갛게 무르익고, 주황색 딱딱한 감도 진홍색 홍시로 탈바꿈한다. 포도알의 보랏빛이 더욱 깊어지는 시기도 바로 이때다. 과일들은 어떻게 자신만의 색을 갖게 됐을까.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새를 유혹하는 붉은빛 사과

 

픽사베이 제공


과일(열매)이 익으면 탐스러운 색을 띠는 이유는 당연한 얘기지만 과일 속에서 색소 물질이 새롭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색소 물질이 왜 만들어지는지, 왜 과일마다 다른 색소 물질이 만들어지도록 진화했는지는 과학자들도 아직 정확히 밝히지 못했다. 유전적 요인부터 빛이나 온도, 습도 같은 외부 환경요인, 자손을 널리 퍼뜨리려는 생명의 본성 등이 복잡하게 얽혀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몇 가지 유력한 가설은 있다. 열매가 자신이 잘 익었음을 동물에게 알리기 위해, 그래서 열매를 먹은 동물을 통해 씨앗을 더 멀리 퍼뜨리기 위해 색과 향기를 내는 물질을 만든다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속에 품은 씨가 영글기 전까지는 나뭇잎 사이에 꼭꼭 숨어 있다가, 씨가 영글고 과육 속에 당분, 지질, 단백질 등이 풍부해지면 화려한 색과 향기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메르 네보 독일 울름대 진화생태학 및 보전유전학연구소 교수팀은 열매를 따 먹는 동물의 종류에 따라 열매의 색이 다르다는 연구결과를 2018년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아프리카 동부 우간다와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 열대식물 97종의 잎과 열매의 색을 조사했다. 그리고 식물들의 계통(유전적 요인)과 외부 환경요인이 열매의 색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분석 결과 조류가 주로 먹는 열매의 색깔은 포유류가 주로 먹는 열매의 색깔보다 붉은색을 띠는 것으로 나타났다. 포유류가 주로 먹는 열매의 색깔은 잎 색깔과 유사한 푸른색 계열도 있는 반면, 조류가 주로 먹는 열매는 그렇지 않았다. 네보 교수는 “유전적으로 가까운 종이라도 번식을 위한 포식자와의 상호작용과 같은 외부 환경요인에 따라 색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추위가 만들어 낸 핏빛 오렌지

 

사과, 딸기, 체리, 포도…. 이처럼 붉은 계열의 과일이라도 그 색은 천차만별이다. 과일마다 조금씩 다른 색소 물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식물에 독특한 색, 향, 맛을 부여하는 물질을 통틀어 ‘파이토케미컬’이라고 부른다. 식물을 뜻하는 ‘파이토(phyto)’와 화학물질을 뜻하는 ‘케미컬(chemical)’의 합성어다.

 

픽사베이 제공


영국 존이네스센터와 이탈리아 지중해작물연구센터 등 공동연구팀은 다양한 오렌지를 이용해 파이토케미컬의 양과 과일 색의 관계를 연구했다. 특히 연구팀은 1600년대 초부터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재배된 기록이 있는 ‘시칠리아 블러드 오렌지(Citrus sinensis)’에 주목했다. 블러드 오렌지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육과 껍질이 일반 오렌지에 비해 전반적으로 붉다. 색을 내는 항산화 물질인 ‘안토사이아닌(anthocyanin)’ 성분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에 공급되는 블러드 오렌지의 대부분은 시칠리아 지역에서 유래한 종이다. 연구팀은 고대 지중해 남부에서 폭넓게 재배되던 일반 오렌지가 기온이 낮은 시칠리아에서 재배되면서 안토사이아닌 성분을 많이 만들도록 진화해, 블러드 오렌지라는 새로운 종으로 분화했다는 연구결과를 2012년 국제학술지 ‘플랜트 셀’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일반 오렌지종(Navelina, Salustiana, Cadenera)과 블러드 오렌지종(Doppio Sanguigno, Tarocco, Moro), 그외 여러 교배종을 대상으로 ‘루비(Ruby)’라고 명명한 유전자의 발현 양을 비교했다. 루비는 안토사이아닌 성분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하는 유전자다. 특정 유전자가 발현되려면 상단부에 이를 시작하게 만들거나 보조하는 조절인자가 붙어야 한다. 연구팀은 루비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하는 조절인자를 비교했다. 그 결과, 블러드 오렌지종의 루비 유전자 염기서열 상단부에는 조절인자가 결합할 수 있는 뉴클레오티드(nucelotide)가 삽입돼 있지만, 일반 오렌지종에는 삽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블러드 오렌지에서는 루비 유전자가 발현되는 반면, 일반 오렌지에서는 거의 발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추가 실험을 통해 고대 지중해의 일반 오렌지종이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은 시칠리아로 옮겨갈 때 뉴클레오티드가 삽입됐을 것으로 분석했다. 결국 추위가 블러드 오렌지의 핏빛 붉은 색과 항산화 물질을 만들어낸 셈이다.

 

외피가 남다른 파란 분꽃 열매


한편 외피의 독특한 구조로 색이 결정되는 열매도 있다. 지중해 지역이 원산지인 상록수 관목 비부르눔 티누스(Viburnum tinus)의 열매가 그 주인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월계분꽃나무라고 부르는 비부르눔 티누스에는 작고 동그란 푸른색 열매가 열린다. 이는 작은 산새류의 주요 먹이원이다.

 


올해 8월 실비아 비그로리니 영국 케임브리지대 화학부 교수팀은 비부르눔 티누스 열매가 익을수록 푸른색을 띠는 이유가 외피 세포벽에 있는 지질층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를 국제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발표했다.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외피 세포벽 바로 아래에는 지질층이 자리잡고 있었다. 연구팀은 비부르눔 티누스 열매가 익는 과정에서 지질층이 생성되고, 이 지질층이 빛의 간섭을 일으켜 검붉은 색이었던 열매가 점점 더 파란색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비그로리니 교수는 “열매 표면에 지질층 구조가 만들어지는 생물학적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며 “이번 연구가 지질층을 이용한 생물학적 염색법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파이토케미컬’로 과일 고르는 법


파이토케미컬은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 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화학물질을 일컫는 말이다. 파이토케미컬은 식물에 색과 영양소를 제공한다. 과일의 색을 보고 과일 속 영양소를 유추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가령 포도나 체리, 딸기, 사과 등에는 수소 이온 농도에 따라 빨간색, 보라색, 파란색 등을 띠는 안토사이아닌이 많이 들어있다. 파이토케미컬의 색은 생체 내 금속과의 결합 상태, 주변 pH 농도 등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같은 안토사이아닌 색소를 가졌더라도 과일의 색이 다를 수 있는 이유다. 안토사이아닌은 강력한 항산화 물질로 면역력을 강화한다. 눈에서 빛을 감지해 뇌로 전달하는 로돕신 합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복숭아나 귤, 오렌지처럼 노란색 또는 주황색을 띠는 과일에는 베타카로틴과 같은 카로티노이드가 많이 들어있다. 카로티노이드는 비타민A의 전구물질이다. 암을 예방하고 세포 노화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밖에도 키위나 메론 등 초록빛을 띠는 과일에는 클로로필 성분이, 커피 콩처럼 검은색을 띠는 과일에는 클로로겐산 성분이 많다. 이것들은 각각 간세포 재생과 당 흡수 억제 효과를 낸다. 파이토케미컬은 과일의 화려하고 짙은 색을 띤 부위에 많이 존재한다. 껍질과 과육의 색이 같은 복숭아나 살구 등의 과일은 껍질을 벗겨 먹고, 색이 다른 사과 등의 과일은 껍질을 함께 먹으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상, 출처;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donga.com/news/view/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