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톤(aceton)은 화학식이 (CH3)2CO인 유기 화합물이다. 색은 없고 휘발성과 가연성, 특유의 냄새가 있다. 아세톤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매니큐어 제거제라고 떠올린다. 그러나 아세톤의 용도는 그 이외에도 매우 다양하다. 국방과 관련된 용도도 있다. 바로 코르다이트 화약의 제조에 아세톤이 필요했다. 코르다이트 화약은 일종의 무연 화약으로, 1889년부터 영국군에서 기존의 흑색 화약을 대신해 군용 탄약의 추진제로 사용되었다.
코르다이트가 발명된 경위와 성분은 다음과 같다. 19세기 후반 여러 나라에서 기존의 흑색 화약에 비해 연기가 적고 더욱 효율이 뛰어난 무연 화약을 채택하자, 영국도 이 추세에 발맞춰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프레데릭 아벨 경이 이끄는 ‘폭발물 위원회’는 제임스 드워 경, W. 켈너 등과 함께 코르다이트를 개발, 1889년 영국 특허까지 취득했다. 이 코르다이트는 니트로글리세린 58%, 니트로셀룰로스 37%, 바셀린 5%의 성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조에는 용해제로 아세톤이 반드시 필요했다. 문제는 이 아세톤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아세톤은 아세트산 칼슘을 정제해서 얻은 천연 아세톤뿐이었다. 그리고 아세트산 칼슘은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 국가들에 주로 매장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적국이 된 독일은 영국에 아세트산 칼슘을 더 이상 수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15년이 되자 영국군의 탄약 성능 및 수급에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을 흔히 ‘포탄 위기’라고 부른다.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과학자 하임 아즈리엘 바이츠만(1874~1952) 이었다. 러시아 태생 유태인이던 그는 1910년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원래 합성 고무 제조 방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천연고무는 고무나무에서 얻는 것이므로 급격히 늘어난 고무 수요에 대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합성 고무의 주성분 중 하나인 이소프렌은 이소아밀 알코올이 있어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소아밀 알코올을 대량으로 만들기 어려웠다. 바이츠만은 이 문제를 저온 박테리아 발효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험 결과 이소아밀 알코올은 나오지 않고 아세톤과 부타놀만 나왔다. 실망한 바이츠만은 연구 결과를 묵혀 두었다. 그러다 영국이 전쟁에서 탄약 문제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바이츠만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영국 정부에 제공했다. 영국은 바이츠만의 공법을 사용해 충분한 양의 합성 아세톤을 생산할 수 있었다. 연간 무려 3만 톤의 아세톤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승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바이츠만은 이 공을 인정받아 1916~1919년간 영국 해군 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커진 입지를 이용해 영국 정부에 유태인 독립 국가를 건설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1917년 11월 2일, 팔레스타인 땅에 유태인 국가를 만들어 주겠다는 영국 정부의 약속인 ‘밸푸어 선언’을 낳았다. 바이츠만 본인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당장에는 쓸모없어 보이던 바이츠만의 실패한 연구가 결과적으로 영국을 세계대전에서 이기게 하고, 유태인 독립 국가 건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상, 출처; 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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