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일상의 상식

과학자, 인본주의자

BK(우정) 2020. 8. 1. 06:57

“카이저 빌헬름 학회가 나치의 정치적 이념에 동참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생체 실험에 동참했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충분하며 카이저 빌헬름 학회의 뒤를 이은 막스 플랑크 학회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후베르트 마르클, 2001년 나치 독일의 유태인에 대한 생체실험에 사과하며

 

후베르트 마르클(1938~2015)이 총재로 재직할 당시, 빌헬름카이저연구회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인간생체실험을 수행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막스플랑크학회 제공


2001년 독일 과학계는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유태인에게 수행했던 비인간적인 과학실험들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진행했다. 막스플랑크연구회가 진행한 이 공식사과는 연구회의 전신인 ‘카이저빌헬름연구회’를 대신해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에게 사과하는 형식이었고, 이 행사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후베르트 마르클이었다. 그는 8명의 유태인 생존자를 초청한 행사의 기조연설에서 “독일의 권위 있는 과학자들이 이런 잔인한 행위를 방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실행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후회하며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치 독일과 카이저빌헬름연구회가 비인간적인 생체실험을 수행했다는 과학적 증거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막스 플랑크 학회의 전신인 카이저 빌헬름 협회 개소식 장면.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위키피디아 제공

 

1933년 독일의 존경받는 철학자였던 마르틴 하이데거는 히틀러의 나치당에 입당하면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이 된다. 이후 이성적이라는 이유로 히틀러와 나치의 활동을 미화했으며, 자신의 스승이자 은인이던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을 아리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퇴출시킨다. 그는 학생들에게 나치혁명에 대한 지지와 참여를 호소했으며, 단지 사상적으로 나치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동료 교수들을 나치에 고발했다. 이후 나치에 실망해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하이데거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나치 참여 문제에 대해 침묵과 변명으로 일관했다⁠. 독일 철학계는 하이데거를 비롯한 히틀러의 철학자들의 문제에 대해 단 한번도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

 

과학자는 어떻게 인본주의자가 되는가


“생물학은 과학 및 기술 산업 문명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제공하는 모든 문제와 기회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진정한 미래의 자연 과학입니다. 생물학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그들의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이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물학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책임은, 자연에 대한 지식이 빠르게 발전하면 할 수록, 과학적 연구에 의해 빠짐 없이 보상될테니까요.” 후베르트 마르클, 《생물학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중에서

 

마르클이 인생의 후반부를 성공적인 과학행정가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정치적 야망이나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자로서 살았던 그의 삶이 광범위한 독서와 글쓰기 등의 지적 훈련을 통해 행정가의 자질을 준비해두었기 때문이다. 마르클이 얼마나 다양한 독서를 했고, 또 과학과 사회에 대해 얼마나 수많은 글을 남겼는지를 보면, 도대체 어떻게 마르클이 통일 독일의 초창기에 기초과학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한 사심 없는 행정을 펼칠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탁월한 과학행정가의 조건

 

그는 오래전부터 과학행정가로서의 정체성을 띈 글을 발표했는데, 그가 독일 생물학계의 학문적·구조적 위기를 느끼고 1995년 발표한 《생물학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를 읽어보면, 자신의 연구에만 이기적으로 몰입하는 상아탑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라, 과학자로 연구실에서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좁게는 과학계의 문제부터 넓게는 독일사회의 문제까지를 치밀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며 변화를 위해 실천하는 행동하는 지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특히 그는 이 글을 통해 학문후속세대가 안정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또한 자신의 임무임을 각성했음을 알 수 있다.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그의 애정은, 막스플랑크연구회 총재로 재직하던 당시 그의 행정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관심은 결국 세계 과학계로 확장되어, 과학자들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많은 글을 쓰고 노력하게 만들었다.

 

마르클의 사례는, 뛰어난 과학행정가가 단순히 정치적 야망이 있는 과학기술인이나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학문적 업적을 이룬 원로과학자와는 확연하게 다른 능력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먼저 탁월한 과학행정가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연구에 정통한 것을 넘어, 과학기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 과학기술인의 정체성이란 자신의 연구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전문적 식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문의 역사와 철학 그리고 그 학문과 사회와의 관계를 깊이 사유할 때 나타나는 신념과 실천을 뜻한다. 따라서 과학행정가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독서 그리고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글쓰기와 실천을 겸비한 사람이어야 한다. 과학기술인의 정체성 위에,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교양을 더했을 때에만, 과학행정가는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과학과 사회를 위한 실천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클은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통해 과학현장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런 문제들을 풀어내기 위해 작가로서 글을 쓰고 행정가로 실천을 했던 공적 지식인이었다. 다른 시대, 다른 문화에서 활동했지만, 마르클의 행보는 20세기 초 중국에서 지질학자이자 행정가,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살았던 지질학자 정문강의 삶과 닮았다. 정문강 또한 지질학자이면서도 폭넓은 독서와 글쓰기로 다양한 중국근대화 논쟁에 참여했고, 지질학을 통해 중국사회를 근대화 시킨 과학자이자 과학행정가였다.

 

‘인본주의 과학’과 ‘과학적 인본주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의 논리적 분석방법을 철학에 적용해서, 지식을 통일하려는 야심찬 꿈을 꾸었던 20세기초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과학자, 과학철학자, 수학자, 사회학자 등의 지식인 모임이었다. 어쩌면 논리실증주의자들이야말로, 장하석 교수가 말한 과학주의자 혹은 과학우월론자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빈 학단의 내부에도 좌파와 우파 지식인이 존재했고, 빈 학단의 구성원이었던 오토 노이라트는 아이소타입 등의 개발을 통해 과학적 논리를 사회적으로 사용하는데 몰두했었다. 말년의 노이라트는 ‘상식의 긴팔’로 자신이 생각하는 통일과학과 지식융합의 철학을 기술했는데, 그 사상을 요약한 그림에서 각각의 지식들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지상의 구조물에 매달린 풍선으로 묘사된다. 

 

피라미드와 풍선으로 대비되는 지식융합의 의미. 이 그림들은 카트라이트(N. Cartwright)가 노이라트(O. Neurath)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라고 한다. 출처 Otto Neurath: Philosophy between Science and Politics (1996)

 

19세기 말, 영국에서 태어나 실험동물학자이자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랜슬롯 호그벤은, 말년에 그의 사상에 ‘과학적 인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만약 나의 삶의 신조에 대해 이름을 붙이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지금 나는 그것을 과학적 인본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과학적 인본주의 역시 새로운 의미의 사회적 관련성을 지닌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교육의 내용을 대촉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과학적 인본주의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식된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의 발전에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이라고 믿는다.”

 

이상, 출처;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donga.com/news/view/38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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