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8년에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 일행이 2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열렬한 금의환향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펼쳐 놓은 이야기보따리에 사람들은 놀랐다. 그들은 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중국에 가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신하로 일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중국이 이탈리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제국으로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누리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지금 같으면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다른 행성에서 살다가 돌아왔다는 주장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헛소리로 치부될 일이었다. 하지만 폴로 일행이 가져온 진귀한 동양의 금은보화를 본 이상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 사람들은 금은보화 가득하고 귀한 향료가 넘치는 인도와 향료제도로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육로)은 이교도(사라센)가 장악하고 있었다. 사라센은 유럽인들에게 귀한 동양의 보물과 향료를 중계 무역하며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기에 유럽인에게 길을 내어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둘러 갈 길은 없을까?
유럽 대륙 서쪽의 변방 국가, 지중해 바닷물에 발을 담글 수 없는 포르투갈이 먼저 ‘인도로 둘러 가는 길’을 찾아 나섰다. 엔리케 왕자(Prince Henry the Navigator, 1394~1460)는 지중해가 아닌 대서양으로 나갔다. 엔리케는 잔잔한 지중해가 아닌 대양 항해를 감당할 거대한 범선을 만들고, 역사 책에 있었던 아프리카를 둘러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반세기 만인 1498년에 마침내 인도로 가는 6개월짜리 항로를 찾았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492년에 인도를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다. 스페인 왕실이 후원하는 이탈리아 항해가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아프리카 남단을 둘러 갈 필요 없이 대서양 서쪽으로 가서 인도에 도착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소요 시간은 포르투갈이 개척한 항로의 5분의 1에 불과한 5주 만에 말이다. 콜럼버스는 “지구는 둥글기에 서쪽으로 가면 인도로 갈 수 있고 자신은 지팡구(일본), 망기(남중국)을 거쳐 갠지스강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아쉽게도 칸은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붉은 살결의 인도인과 앵무새, 황금에 대한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들고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콜럼버스는 폴로처럼 동방의 금은보화를 가져오지 않고 풍성한 ‘목격담’만 가져왔다. 하지만 자비로운 스페인 여왕은 이듬해의 2차 항해 때 칸에게 전달하는 친서까지 콜럼버스에게 주었다. 원정대는 무려 1500명으로 이루어졌다. 콜럼버스가 서쪽 뱃길로 인도를(?) 오가는 동안, 1499년에 포르투갈의 다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인도(!)에서 돌아왔다. 다가마는 인도 본토에 상륙했고, 군주도 만났고, 인도의 진귀한 보물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인도에 간 확실한 물증 없이 의심스러운 인도 여행 주장만 하는 콜럼버스와는 확실히 달랐다.
이제 인도로 가는 두 가지 길 즉, 스페인의 서쪽 항로와 포르투갈의 남쪽 항로를 두고 두 나라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20세기 후반에 벌어진 우주를 향한 미국과 소련이 경쟁을 떠올리게 할 만큼 치열했다. 두 나라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공방전을 벌였고 그 결과 새로운 세상을 양분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유럽의 변방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일약 전 지구적인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누가 발견했던 인도로 가는 6개월짜리 남행 항로보다는 5주짜리 서행 항로가 더 인기가 많았다. 한적하던 대서양은 서쪽으로 가는 뱃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부는 폭풍을 만나 북쪽으로 떠밀리거나 남쪽으로 표류했다. 그런데 거기에도 새로운 땅이 있었다.
1503년, 이탈리아의 항해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의 항해 보고서가 공개됐다. 그는 2년 전 포르투갈 선단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 2개월 동안 항해한 다음 적도 이남에서 ‘미지의 땅’에 도착했다. 지상 낙원과도 같은 그곳은 인도도 아니고, 이전에 알려진 적이 없는 ‘새로운 세상(Mundus Novum)’이라고 주장한다. 베스푸치의 주장이 맞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유럽인들은 꿈에도 몰랐던,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거대한 땅덩이였으니 말이다. 현재의 브라질 지역이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여전히 자신이 일본(사실은 아이티), 중국(사실은 쿠바)를 거쳐 인도까지 갔다고, 믿었고 죽을 때까지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만약 콜럼버스가 자신이 네 번이나 갔던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도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인지 궁금했을 것이고, 아마 전혀 알려지지 않는 신세계라고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세계의 이름은 컬럼비아(Columbia) 혹은 이사벨리아(Isabellia, 콜럼버스를 후원한 이사벨라 여왕의 이름을 따서)가 되지 않았을까? 이처럼,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 제일 어렵다. 반면에 콜럼버스보다 10여 년 늦게 신대륙에 갔던 베스푸치는 선입견 없이 자신이 도착한 곳을 인도가 아니고 새로운 땅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곳을 과감하게 신세계로 선포했다.
4년 후인 1507년, 지도 제작자인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 1470~1520)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한 신세계를 아메리카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후로 대서양 서쪽에 섬으로 표시된 테라 상크타 크루치스, 문두스 노부스 혹은 테라 도스 파파가이오스, 이슬라 데 산타 쿠르스, 브라질, 인디아스 옥시덴테스로 불리던 땅은 모두 아메리카가 되었다.
1507년의 아메리카는 지금의 브라질 북부였다. 지도의 공백이 점차 새로운 발견으로 채워지면서 아르헨티나와 칠레도 아메리카에 포함된다. 나중에는 적도 이남에서 새로 발견된 모든 땅을 아메리카에 속하는 것으로 쳤고, 15년 만에 현재의 남아메리카 전부가 바로 아메리카가 되었다. 이 무렵 북아메리카는 남아메리카와는 별개의 땅덩어리로 보았다. 하지만 1538년에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 1512~1594)의 지도에는 남북 아메리카가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등장한다. 브라질에서 시작한 아메리카는 이제 대서양 서쪽을 남북으로 가로막는 거대한 땅덩이가 되었다.
16세기 중반에, 스페인의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 1484~1566) 주교는 자신들이 ‘신인도(Nuevus Indias)’로 부르는 땅을 아메리카로 부르는 것에 격분하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 발견의 영광을 콜럼버스로부터 가로챘다는 과격한 주장을 했다. 물론 발견 ‘행위’로 본다면 콜럼버스의 이름이 붙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자신의 발견 사실을 스스로도 몰랐다. 반면에 베스푸치는 자신의 발견을 스스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신세계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을 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렇게 항해자의 이름이 붙은 대륙이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했다.
이상, 출처; 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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