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1.
어차피 돌아서야 할 길을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인가. 바람에 이는 낮은 먼지들 속에서도 나는 길을 잃는다. 어림 짐작으로 다시 시작한 행로는 얼마나 될까. 돌아갈 곳은 잊혀지고, 다가갈 곳은 보이지 않는다. 손을 내밀어 촉각을 더듬어도 만져지는 곳은 비어있는 곳. 어떤 온기도 부드러움도 하물며 고통도 없다. 가자. 가야 한다. 보이지 않더라도, 느끼지 못하더라도 어디인가를 향하여야 한다. 그 길은 돌아갔어야 할 곳을 향할 수도 있고, 가지 않았어야 할 곳을 향할 수도 있다. 바람이 지나는 곳은 바람의 길, 강이 흐르는 곳은 강의 길. 몸을 스치는 그 아우성들 속에서 나는 움직여 길을 만든다. 어차피 꿈이려니.
2.
무겁고 지친 몸을 끌고 어느 마을에 이른다. 서부 영화의 장면처럼 집들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고, 흙길에는 작은 회오리 바람이 인다. 사람들은 간혹 보이나 모두 무관심한 얼굴들. 작은 회오리 바람은 내 가슴속의 큰 회오리 바람과 공진을 일으키고. 또 바깥 세계의 미려한 진동이 내 가슴 속의 세계에 전해오는 순간. 그들의 무관심이 내게는 관심으로 다가오는 순간. 이런 과정은 증오스럽다. 이제 벗어날 때도 되었는데. 몸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과는 다르나, 모두가 간혹 작은 행복, 아니 평안함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이 마을은 그냥 지나쳐야 할 듯 하다. 작은 회오리 바람은 나를 따라온다.
3.
멀리 보이는 곳에는 바다가 있다. 바다와 나를 사이에 두고, 작은 움막들이 미더덕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움막 안에는 바다 속에 있어야 할 것들을 뭍으로 건져 내어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살고, 나는 그들에게 댓가를 치르고 바다를 만난다. 바다는 걸음이 멈추는 곳. 끝이 없고, 속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 곳. 그래서 가슴 속, 버리고 싶은 찌꺼기들을 쏟아 붓는 재미가 있다. 헛구역질이 나올 때까지 토악질을 한다. 깊이 들이키고 뿜어내는 담배 연기보다 더 큰 무엇들이 바다로 떨어진다. 작은 회오리 바람도 함께. 가벼워진 느낌이다. 돌아서는 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는 붉은 해와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마저도 삼켜버리고, 바다가 두려워진 나는 다시 뭍으로 향한다.
4.
뭍은 겨울이다. 자연은 모든 행위를 정지하고, 숲은 침묵한다. 땅은 얼었고, 그 위를 지나는 이들은 두건 속에 얼굴을 묻고, 곁눈질조차 하지 않는다. 그늘진 곳, 어두운 곳은 보이지 않는 듯 외면당한다. 오늘은 거룩한 날, 곁눈질을 하지 않는 이들은 저마다 촛불을 들고, 십자가 아래로 향한다. 거룩한 분께서 머물렀던 마을은 추위가 없는 곳이었던가. 그 분의 차림새를 보면 그리 생각된다. 추위가 심하였다면,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춥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약자들은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지친 캐럴과 불빛 아래에 있으려니 이런저런 생각들로 혼란스럽다. 십자가의 도시를 떠난다. 그늘진 곳, 얼어붙은 강, 그 침묵을 듣고 싶다.
5.
강은 침묵이다. 특히 겨울의 강은 극단의 침묵이다. 갈대는 강을 깨우려 하고, 바람은 강을 일으키려 한다. 흘러온 사연들과 흘러갈 사연들. 숱한 사연들을 품고 겨울 강은 침묵한다. 모든 것들은 멈추어 있다. 산이 그늘을 만들어 한 켠을 기대듯이, 나도 강기슭에 올라 강에 기대어 본다. 미동도 하지 않는 강. 냇물은 소리 내어 흐르고, 바다는 파도로 흐느낀다. 나는 얼어버린 강 위에서 냇물이 되고 파도가 된다. 소용돌이치는 생각 생각들. 큰 동요 속에서 마침내 찾아 온 고요. 나는 겨울 강 위에서 침묵이 되고 있다.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6.
강가를 걷는다. 갈대는 끊임없이 서걱이고 날은 저물어 간다. 사람의 마을에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연기는 하늘로 올라 밤하늘의 구름이 된다. 구름을 뚫고 별빛은 내게로 쏟아진다. 멀리서 오는 별빛은 눈에 닿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은 가슴에 닿지를 못한다는 생각에 불현듯 서글퍼진다. 계절이 바뀌는가. 강과 마을 사이의 들판에는 이제 막 새순이 돋고 있다. 멀리서 오는 별빛에 새로이 시작하는 생명들이 어렴풋이 형체를 드러낸다. 그들 또한 나고 자라고 시들어 가리라. 별을 향할 수 없어,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 사람의 마을을 향한다. 막 나오기 시작한 새순들이 다칠까 조심스레 발길을 옮긴다. 별빛이 달빛에 가리워지고 있다.
7.
지난 시간은 먼 곳으로 흘러갔다. 나는 모르는 곳에 잠시 머물고 있고, 저 멀리서 흘러 온 다른 시간과 만난다. 이제 머무는 곳을 떠나려 한다. 책 한 권과 얼마만큼의 노잣돈이면 족하다. 머무는 동안 쇠하여진 몸이 종종 기침을 한다. 흙이 아닌 것들로 만들어진 도시의 길. 먼저 흙 길을 찾아보기로 한다. 산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흙 내음을 느낀다. 산을 오르기보다는 산을 둘러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젊은 날 왜 산을 오르려고만 하였던가. 산을 오르느라 눈 앞의 가파른 길에만 매달렸다. 산의 둘레를 걸으면 산과 들, 그로부터 오는 온갖 소리와 내음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은 어차피 천천히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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