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가 쓴 대서사시 ‘신곡’은 그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어두운 숲에서 홀로 길을 잃고 서성거린다. 주변의 울창한 나무와 풀은 그를 어둠으로 압도한다. 어리둥절한 그는 어떻게 그곳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잠에 빠져있던 자신을 기억하며, 숲에서 빠져나가려 애쓴다. 하지만 어둠은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느 순간 저 멀리 언덕 위에서 어슴푸레 빛이 보인다. 단테는 길 없는 곳에 길을 만들면서 그 빛을 향해 나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짐승 세 마리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다. 다시 어두운 숲으로 밀려난다. 이때 누군가가 그를 부른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쉰 목소리로 함께 가자고 한다. 그가 존경하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다. 하지만 언덕 위의 빛으로 곧장 이르는 길은 없다. 우회를 해야 한다. 결국 둘은 함께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오르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그 기록이 ‘신곡’이라는 책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잠들어 잃었던 이성의 회복을 상징한다. 이성의 생각하는 힘으로 단테는 먼 길에 오른다. 그의 눈에 비친 지옥과 연옥은 지극히 처절하고 천국은 지극히 평온하다. 그는 인간으로서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의 심연에서 시작해 행복의 궁극까지 오른다. 그가 ‘신곡’에서 들려주는 저승 이야기는 잠에서 깨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 이야기는 현실로 여기기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당신은 차라리 꿈이라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저승 이야기를 당연한 현실처럼 들려준다.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은 성진이 잠에 들어 꿈속에서 겪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반면, ‘신곡’은 단테가 잠에서 깨어 현실에서 겪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대의 많은 독자들은 단테가 ‘신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진짜 현실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원래부터 피부가 검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곱슬곱슬한 단테를 거리에서 우연히 본 베로나 여자들은 ‘저 사람이 지옥에 다녀오느라 저렇게 타고 그을렀다는군’ 하며 수군댔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단테는 혼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보카치오 ‘단테의 삶’) 단테는 아마 허구의 인물과 현실의 자신을 착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작가적 성취감을 맛보았으리라. ‘그럼 그렇지, 당신들이 안 믿고 배겨?’ 우리는 중세의 베로나 사람들처럼 순진하지 않다. 다들 아시듯이, 이렇게 현실이라 고집하는 자체가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 아래 진실이 감춰져 있는 법이다. 적어도 문학에서는 그렇다. 단테는 우리가 살아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저승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현실의 풍경으로 채운다. 그가 들려주는 저승 이야기에서는 시뻘건 불이 타오르고 피비린내가 진동하기도 하지만,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들리고 온갖 꽃이 만발하며 눈부신 햇살이 가득하기도 하다. 그는 시간이 멈춘 영원한 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실린 우리의 현실로 성공적으로 재현한다. 그럼으로써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지우고 이야기와 현실의 구분을 없앤다. 그가 저승에서 만난 수 많은 인물들도 죽음 이후에 또 다른 현실을 겪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이승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단테에게 낱낱이 들려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한다고 느낀다.
단테는 이 위대한 서사시에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라는 제목을 붙이고 경험과 마음에서 나온 자기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독자 하나하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단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저승을 여행한다. 물론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저승의 인물들이 현실의 정체성을 간직하듯, 저승의 여행자 단테 역시 일상의 나날 속에서 먹고 입고 느끼는 현실의 인간임을 생각해야 한다. 베아트리체는 연옥의 꼭대기에 오른 단테 앞에 “단테여!”라 부르며 등장한다. ‘신곡’에서 ‘단테’라는 이름이 딱 한 번 나오는 이 대목에서 방금 말한 경험적 인간으로서의 단테가 확 다가온다.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인간이면 누구나 예외가 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존재로 대한다. 그래서 자신이 죽은 뒤 유혹에 넘어가고 세파에 시달린 단테를 꾸짖고, 그 앞에서 단테는 고개를 떨군다. 그는 완전한 인간도, 모범적인 시민도 아니다. 베아트리체와 영원불변한 사랑을 실현한 존재는 더욱 아니다. 그는 다만 그런 자신을 부끄러움의 눈길로 돌아볼 뿐이다.
단테는 저승을 여행하는 동안 과거의 삶을 자꾸 되돌아본다. ‘구운몽’의 성진처럼 잠을 자는 행복한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의 냉혹한 성찰자로서다. 잠이란 이성을 잃고 영혼이 태만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잠을 철학의 양분이 고갈되어 정신이 조롱을 당할 때 겪는 병으로 묘사한다. 잠에서 깨어 이성을 회복하며 시작한 여행이니만큼, 단테는 여행 내내 이성의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기억에 담아내려 애쓴다.
‘나 하나 홀로, 나아갈 길, 슬픔과 치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르침이 없는 정신은 이들을 말해주리라.’(지옥 2곡 3-6행)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단테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겠다 다짐한다. 잠이 망각이듯, 정신은 곧 기억이다. 기억은 개인의 체험을 마음에 찍어낸 낙인이다. 기억은 저승의 여행자 단테가 의지하는 유일한 기록 장치다. 정신이 그르침 없이 말해주리라는 기대는 그의 기억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이야기해주겠다는 뜻이다. 슬프고 외로운 길이지만, 외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들려주리라 약속한다. 그래서 마침내 천국의 꼭대기에 이른 그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 다름 아닌 자신의 저승 이야기이자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러나 책은 미완성이다. 천국의 꼭대기, 그 궁극의 구원과 함께 책을 완성하는 대신 단테는 이승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문득 잠에서 깨어나 저승 이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그는 저승 이야기와 함께 살아간다.
단테에게 삶이란 완성될 것이 아니라 자꾸 되풀이해서 써나가야 할 끝없는 이야기와 같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엮어 ‘신곡’에 담아냈다. 이야기 속에서 정착보다는 방랑함으로써, 해결보다는 물음과 함께 현실을 돌아보고 거기에 처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단테의 ‘신곡’이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당신에게 미완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단테 자신의 미완의 이야기를 당신 자신의 이야기로 완성하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신곡’을 펼칠 때 당신은 단테의 이야기를 읽는 동시에 당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곡’은 당신을 살아있게 한다. 잠에서 깨어 삶에 직면하면서 삶 앞에서 더는 비겁하지 않게 당신의 이야기를 쓰도록 도와준다. 단테의 이야기는 저승 여행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문학적 허구이지만 그 속에는 또한 종교와 신화, 정치, 도덕, 이념, 예술, 역사 등 무척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단테가 그러하듯, 우리는 그 모든 이야기를 두르고 살아간다. 인간은 이야기를 하는 존재다. 이야기를 믿고 이야기에 의거해 세상을 바라본다. 이야기는 삶이 되고 삶은 다시 이야기가 된다. 삶은 이야기의 재료가 되고, 이야기는 삶에 길을 제시한다. 어떤 이야기는 위협하고, 어떤 이야기는 위로하며, 어떤 이야기는 용기를 준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한다. 앞으로 얼마나 많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우리 인간을 받쳐왔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상, 출처;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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