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파우스트 생각

BK(우정) 2020. 2. 28. 19:12

영혼을 팔고 젊음과 재능을 얻는다는 TV 드라마를 접했다. 아니나 다를까, 원작이 〈파우스트〉다. 19세기 독일에서는 학자가 건설자로 변신했지만 ‘한류’의 나라에서는 늙은 무명 가수가 히트곡을 양산하는 천재 작곡가로 바뀐다. 특별한 인간이 되려면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예로부터 흔했다. 21세의 젊은 괴테는 우연히 듣게 된 영아살해 사건을 민담에 나오는 악마와의 계약에 접목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죽이고 정신이 이상해져 감옥에 간 하녀 이야기에 착안해 60년에 걸쳐 집필한 인생작이 희곡 〈파우스트〉다.


극작가뿐만 아니라 소설가, 시인으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던 괴테는 문호의 테두리마저 넘어섰다. 색채학과 해부학에 기여한 과학자이자 바이마르 공국(公國)의 재상으로서 활약하는 등 진짜 ‘명함’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별이 홀로 빛나지 않듯이 18~19세기 독일은 천재의 세기였다. 철학의 칸트, 음악의 베토벤, 문학의 실러는 괴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당시 영방국가(領邦國家)로 분열만 거듭하는 독일의 척박한 현실을 잊기 위해 내면의 세계로 망명한 이들 덕분에 학문과 예술의 옥토가 일구어졌다. 특히 독일어를 다듬은 괴테가 ‘하나의 독일’을 뒷받침한 모태가 됐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통일의 접착제가 된 〈파우스트〉는 대략 2부로 구성된다. 비극의 주역 파우스트는 세상을 모조리 알고 싶지만,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환멸에 빠진 박사다. 방황하는 파우스트를 두고 신과 내기를 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며 거래를 제안한다. 악마를 하인으로 맘껏 부리되, 파우스트가 ‘순간아 멈추어라, 그대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한다면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차지가 된다는 계약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법칙을 따르는 악마는 창조 자체가 인간에게 고통과 죄악이라고 여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인데 왜 태어났느냐는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악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의 탄생과 발전을 부정하는 무(無)의 영역에서는 시간의 경과로만 가능한 인간의 변화와 성장은 부인된다. 


반면에 파우스트가 계약한 이유는 쉼 없는 자신의 노력에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 일이 없다는 확신이 있어서다. 미국 학자 마샬 버만은 〈현대성의 경험〉에서 파우스트의 변모를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사이의 차이로 분석한다. 말씀의 세계에서 행위의 세계로 넘어가는 파우스트는 쉬지 않는 행동으로 인간됨을 증명하는데 이것은 하늘과 땅을 스스로 창조하여 신성을 증명한 구약의 신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신(神)적 차원으로 올라가려는 그에게 안식과 향유의 시간은 사탄의 노예살이나 진배없다.


드디어 파우스트는 ‘시간의 여울과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떠나는 여정에 메피스토펠레스와 동행한다. 둘의 첫 행선지는 라이프치히의 지하 술집이다. 알코올에 젖은 속인들의 ‘음향과 분노’를 체험하고 이어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는 순결한 처녀 그레트헨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이른바 시민 사회가 제시하는 욕망의 문법에 충실하다. 다음 순서는 궁정 사회의 예법이다. 황제의 궁성으로 간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불러낸 미의 표상 헬레네와 고전적 이상향에서 단꿈을 누리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최종적으로 파우스트는 행위가 전부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근대적 신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간척 사업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노부부의 생명을 빼앗고도 멈추지 않는 파우스트의 욕망은 자신이 이뤄낸 유토피아의 공간을 상상하는 순간 ‘멈추어라’는 감탄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득의양양한 메피스토펠레스가 그의 영혼을 가져가려는 찰나, 천사와 여인들이 나타나고 파우스트는 구원받는다. 


인류의 대적(大敵)은 희망과 두려움 


따지고 보면 명백한 계약 위반이다. 왜 괴테는 룰을 깼을까. 독문학자 주일선에 따르면, 괴테는 희망과 두려움을 인류의 가장 큰 적으로 봤다.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희망은 폭력으로 바뀌기에 십상이고 두려움은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어 인간의 성장을 훼방 놓는 탓이다. 비록 파우스트는 죄를 짓는 방황을 했지만, 그의 삶은 중단 없는 행동의 연속체였다. 사람됨을 입증하는 것은 ‘상처 없는 영혼’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통한 상처투성이의 영혼이다. 그렇게 본다면 파우스트의 구원은 신도 악마도 아닌, 오롯이 그 스스로 창조한 셈이 된다. 괴테는 매일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도 행동을 통해 자발적으로 생(生)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격려를 작품을 통해 보내고 있다. 일찍이 꼬마 괴테는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리스본 대지진이 신의 섭리인지 묻는 어른들에게 ‘창조주가 아무리 큰 시련을 내리더라도 서로를 도우려는 인간의 협력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종교적 결정론에서 벗어나 어떤 운명도 하기 나름이라는. 인간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조숙한 예지(叡智)에 허리를 굽히고 싶다.


이상, 출처; 부산일보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9080818453762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