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괴테와 실러, 그들의 무대 바이마르

BK(우정) 2020. 2. 29. 09:08

한 사람은 식물을 보고 ‘경험’이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념’이라고 했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이런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이 두 사람은 독일문학과 세계문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그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와 프리드리히 폰 실러(1759~1805)이며, 그들의 활동무대는 독일 바이마르였다.


바이마르는 인구가 6만5000명 정도로 작은 도시이다. 그러나 시내 중심은 기차역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일단 국립극장을 찾아가기로 하고 시내로 이어지는 도로를 죽 따라 내려갔다. 도중에 한두 번 물으면서 30분 정도 걸으니 국립극장이 보였다. 괴테와 실러의 기념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상한 것만큼 그렇게 거대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고 상당히 정겨운 인간적인 크기의 상이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 부인이 지나간다. 현지인인 것이 틀림없다. 괴테와 실러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려고 이곳에 왔다고 말을 건넸더니, 먼저 ‘실러 하우스’와 ‘괴테 하우스’를 보고 난 다음 그들의 묘지를 방문하라고 친절히 일러준다. “그래도 삶이 죽음보다야 먼저지요”라며 내가 ‘썰렁한’ 유머와 더불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활짝 웃는다. 사실을 말하면 그 중년 부인은 지리적 관점에 따라 나에게 길을 일러 준 것이었다. 국립극장을 기점으로 하여 차례로 실러 하우스, 괴테 하우스, 그리고 이들의 묘지가 나온다.


국립극장 바로 옆에 실러의 이름을 딴 길인 ‘실러슈트라세’가 있고 바로 그 길 옆에 실러 하우스가 서 있다. 길 이름과 집 이름이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러 하우스는 실러가 살던 집인데 그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보존해 놓았고, 그 뒤에 있는 건물 한 채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가 방문한 날은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방문객이 꽤 많은 편이었다.


실러는 인간의 자유라는 이념을 추구한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문학 작품은 억압적인 현실세계 너머의 자유로운 이상세계를 그렸다. 이에 상응하여 실러는 문학적 이상세계가 상연되는 연극무대를 단순히 카타르시스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도덕적 공간으로 보았다. 이는 실러의 미학 이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미적 교육, 그러니까 예술에 의한 승화를 통하여 인간을 아름다운 영혼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운 영혼은 인간의 두 본성, 곧 이성과 감성(그리고 정신과 물질) 그 어느 하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양자를 조화롭게 결합시킨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실러에게 이 아름다운 영혼은 이상적인 인간상이며, 그의 예술적 창작을 이끄는 최상의 이념적 원리이자 그의 삶에 대한 최상의 실천적 요구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국가도 바로 이 아름다운 영혼을 그 전제조건으로 한다고 실러는 확신했다. 이러한 미학 이론에 기초해 실러는 예술가에게 인간의 미적 교육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부여했다.


괴테 하우스는 실러 하우스와 지척에 있다. 아니, 저녁 식사 뒤 고무신을 끌고 가볍게 마실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괴테 하우스는 실러 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저택과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실러와 괴테의 세계관만큼이나 확연히 다르다. 실러 하우스가 서민적이라면 괴테 하우스는 귀족적이다. 입장료도 괴테 하우스가 실러 하우스보다 두 배나 비싸다. 그런 만큼 볼 것도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그런지 방문객도 더 많아 보였다. 괴테 하우스는 실러 하우스와 달리 괴테의 이름이 들어간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평지(平地)’라는 뜻의 ‘프라우엔플란’에 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도다”라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이 연상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괴테는 자연과 경험을 중시하는 리얼리스트,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고한 리얼리스트”였다. 그는 이념에 매달리는 철학적 사변이 문학 작품에 독이 된다고 보았다. 이념은 문체를 자연스럽게 만들지 않고 추상적이고 장황하고 비비 꼬이게 만들며, 따라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그는 생각했다. 괴테의 주장으로는, 차라리 실무자나 생활인처럼 실제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글이 아주 뛰어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변적인 철학적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정도 무의식적으로, 말하자면 본능적으로 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괴테의 문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한 것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서 경험적으로 진행되는 인간의 행위였다. 그의 대표작 <파우스트>는 중세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기독교적 모티프를 담고 있어 어떤 숭고한 이념을 구현하고자 한 작품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대작에서 괴테가 그리고자 한 것은 천국으로부터 속세를 거쳐 지옥에 이르는 행위의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서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괴테는 이 역시 작품 전체 또는 개별적인 장면을 지배하는 이념으로 보지는 않았다.


실러의 미학 이론을 빌리자면, 괴테는 ‘소박문학’의 대표자이며 실러 자신은 ‘감상문학’의 대표자이다. 소박문학이 자연과 인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한다면, 감상문학은 현실세계에 없는 이상세계를 그리고자 한다. 또한 예술가에 대한 표상에서도 괴테는 실러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괴테의 주장을 따르면, 예술가는 가장 이기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오로지 그에게 환희와 가치를 주는 것만을 실행해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을 예술가가 이기주의자나 쾌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예술가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개인적 재능과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한다면 인류의 문화적 수준이 극대화되며, 그 결과로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가 극대화된다는 것이 괴테의 메시지라고 해석하는 쪽이 타당할 것이다.


더 나아가 모더니티 이론에서도 괴테와 실러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두 거장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인과적인 법칙에 의해, 그리고 기술적 수단과 계산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곧 인간은 고대 그리스 시대와 같은 총체성을 상실하고 단편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신과 자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에 따르는 처방에서 두 사람은 근본적인 상이점을 드러낸다. 먼저 실러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소생시킴으로써 총체적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적 유일신 사상과 합리주의 및 유물주의에 의해 탈신화(脫神化)된 자연과 인간을 재신화(再神化)시키고자 했다. 그는 이 가능성을 시와 예술에 의한 미적 교육에서 찾았다. 이에 반해 괴테는 근대적 사회질서에서 총체적 인격을 갖춘 아름다운 영혼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아름다운 영혼’에 체념어린 작별을 고하고 일상의 요구, 곧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직업 생활에 헌신하는 것이 근대인에게 주어진 역사적-문화적 숙명이라고 괴테는 확신했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사람, 아니 괴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두 “대척적인 정신들”이 처음에 서로 친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1794년 7월부터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가까워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각각 칸트 철학과 자연과학이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실러는 인식을 경험과 오성(지성)의 공동작용으로 파악한 칸트의 철학을 깊이 연구했다. 칸트에게 인식의 가능성은 곧 경험과 그 대상의 가능성이다. 이에 비해 괴테는 탁월한 자연과학자이기도 했다. 자연과학에서는 개별적인 경험적 현상들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고자 하는데, 괴테 또한 이런 본령에 충실하려 했다. 아무튼 실러와 괴테는 그들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똑같은 목표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괴테는 실러와의 우정을 “행운의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사람은 그 뒤 직접 대면하거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논하고 같이 작품을 썼으며, 국립극장 일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 공동작업을 좀더 집약적으로 하기 위해 실러는 예나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1799년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둘의 우정과 협력은 실러가 180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한 작은 공국의 수도 바이마르는 일약 독일문학과 세계문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실러 하우스, 특히 괴테 하우스를 둘러보느라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사실 괴테 하우스는 그 안에 전시된 유물의 역사적·문화적·미학적 가치를 꼼꼼히 따지면서 살펴보려면 이삼일은 족히 걸릴 듯했다. 괴테 하우스를 나온 뒤 도로 하나를 건너 외곽으로 빠지는 또다른 도로를 따라갔다. 조금 걷다 보니 공동묘지가 보인다. 흰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공동묘지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 두 거장은 일반묘지가 아니라 바이마르를 통치한 군주가문의 현실(玄室: 주검이 안치된 무덤 속 방) 안에 생전처럼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이 현실은 입장료를 받는데, 내부의 사진촬영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니 방문객 서너 사람이 조용히 현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괴테와 실러의 주검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가냘픈 해가 노루 꼬리만큼 남아 있었다. 독일의 겨울은 오후 4시만 지나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남은 시간 동안 괴테와 실러의 흔적을 하나라도 더 확인하려 시내 이곳저곳을 살폈다.


바이마르는 작지만 아주 장중한 도시이다. 그도 그럴 것이 1552년부터 1918년까지 무려 400년 가까이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수도였다(1809년에는 작센-아이제나흐 공국과 합쳐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이 되었으며 1815년에는 대공국이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이마르 시청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독특해 보여서 자료를 찾아보니 1841년에 지은 네오고딕 양식(18~19세기에 부활한 고딕 양식으로서 ‘고딕 리바이벌’이라고도 부른다)이란다. 그 이전의 시청은 1583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1837년 도시에 화재가 일어나 타버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의 바이마르 시청은 괴테와 실러가 아는 시청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괴테 광장’을 찾아갔다. 그 광장 안팎의 사람과 건물과 거리를 보면서, 괴테와 실러처럼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니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인류의 정신적 문화를 풍요롭게 한 역사적 사례들을 떠올려 보았다. 공자와 노자, 퇴계와 율곡,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와 베버….


이상, 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710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