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만물을 풀이나 개로 삼는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왕필의 노자》에서
나 또한 누구 못잖게 코로나19의 종식을 바란다.
하지만 바람, 기대, 희망만으로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왕필은 겨우 18세의 나이에 《노자주(老子注)》를 펴내고 23세에 요절한 천재다. 기원전 6세기의 인물로 전해지는 노자가 지었다는 《노자》는 5200여 자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내용이 심오해 각 문구마다 해설(주)을 담은 책을 펴낸 학자가 3000명이 넘는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1000여 종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된 주석서가 바로 왕필의 《노자주》다. 왕필은 위에 인용한 문구에 대해 “천지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맡기니 인위나 조작이 없으며, 만물이 스스로 서로 다스리므로 천지는 어질지 않다”며 “어질다는 것은…만들고 세우고 베풀고 교화하므로 사물이 그 참된 본래의 모습을 잃는다”고 해석했다. 이어서 “천지는 짐승을 위해 풀을 내지는 않았지만 짐승은 풀을 뜯어 먹고, 사람을 위해 개를 낳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개를 잡아먹는다”고 덧붙였다.
뜬금없이 ‘노자’의 한 구절과 왕필의 주를 언급한 건 지난주 신천지 교도를 중심으로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한 상황에서 교주가 한 말 때문이다. “금번 병마 사건은 신천지가 급성장함을 마귀가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의 짓으로 안다”며 “더욱더 믿음을 굳게해 이를 극복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바이러스 전염은 확률적 사건일 뿐
페스트가 창궐한 유럽 중세시대도 아니고 21세기에 이런 말이 먹히는 현실에 씁쓸해하다 문득 3세기에 살았던 청년 왕필의 사고가 얼마나 모던한가를 깨닫는다. 왕필의 사고를 지금 상황에 대입해보면 “천지는 바이러스를 위해 사람을 낳지는 않았지만 자연에 맡기니 바이러스는 사람을 숙주로 삼아 증식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어찌 신천지의 번성을 시기해 저 멀리 중국 우한에서 세를 일으켜 한국으로 건너와 대구에서 교도들을 공격했겠는가. 그저 바이러스에 감염된 숙주(사람)에 딸려와 이 사람이 말을 하거나 기침을 할 때 입에서 튀어나온 미세한 침방울에 실려 세상에 던져졌고 때마침 주위에 몰려 있는 새로운 숙주 무리에 안착해 침투한 뒤 증식에 성공한 것뿐이다.
설 연휴를 전후해 우한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란 사람들은 외출과 모임을 자제하고 나갈 때는 마스크를 쓰고 수시로 손을 씻었다. 중국에서 매일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건너옴에도 코로나19 환자가 간헐적으로 발생한 이유다. 이처럼 숙주들이 갑자기 몸을 사리는 바람에 독감바이러스가 타격을 입었다. 불과 3주 사이에 병원을 찾은 독감 환자 수가 3분의 1로 줄었다. 감염된 숙주가 주위에 바이러스를 퍼뜨려도 새로운 숙주를 만나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사람들의 경계심도 점차 느슨해졌고 결국은 대형 사고가 터졌다. 불운하게도 신천지 대구교회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어쩌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숙주가 이 공간에 들어간 건 바이러스에게는 횡재를, 인간에겐 비극인 결과를 낳았다. 일각에서는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을 신천지 탓으로 돌리지만 이 역시 ‘마귀의 짓’이라는 주장과 별반 다름없는 수준의 발상이다. 신천지가 바이러스를 고의로 퍼뜨린 것이 아닌 바에야 실내 공간에 바이러스가 퍼져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전염된 교인들은 그저 불운한 피해자일 뿐이다.
WHO 대 CDC
지난 19일(신규환자 20명이 무더기로 발생하며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 날이다) 정치인 출신인 한 장관이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전화 인터뷰에서 “사실 미국 같으면 중국 사람들을 완전히 입국차단을 하고, 또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상당히 정치적인 분위기로 끌고 가고 있다”는 말을 했다. 이 분이 어떤 근거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전염병 분야에서도 가장 귄위있는 기관이라고 생각하지만 미국인들은 다르다. 미국은 질병예방통제센터(CDC)라는, 전염병 전반을 아우르는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직원이 1만1000명 가까이 되고 1년 예산이 111억 달러(약 13조 원)나 된다. CDC는 때로 WHO와 협력하기도 하지만 늘 같은 입장인 건 아니다. 코로나19 사태도 이런 경우다. WHO의 사무총장은 우한에 발생한 폐렴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라는 의사(지난 2월 7일 사망한 리원량)를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체포했을 정도로 일을 키운 중국 정부를 두고 “대처를 잘 하고 있다”며 두둔하기 급급해 많은 욕을 먹었다. 우한을 포함한 후베이성은 물론이고 중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인정한 뒤에도 중국인 입국차단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이를 근거로 2월 4일부터 후베이성만 입국차단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반면 CDC는 우한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중국 당국의 은폐로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사스나 메르스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판단하고 지구촌 판데믹(대유행)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일찌감치 경고했다. 미국 정부의 중국인 입국차단 조치는 CDC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른 것 아닐까. CDC 산하 국립면역호흡기질환센터 낸시 메소니에 국장은 21일 브리핑에서 “중국에서 오는 여행자들(미국인) 가운데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 모두를 걸러낼 수 있다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불가능할 것이다. 아직은 미국에 퍼지지 않았지만, 그럴 수 있고 아마 언젠가는 일어날 것(but it is possible, even likely, that it may eventually happen)”이라며 “우리의 목표는 바이러스가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늦춰 대비할 시간을 버는 것”이라고 말했다.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CDC는 22일 한국과 일본을 여행경보 2단계(강화된 주의 실시) 국가 목록에 올렸다. 참고로 중국은 3단계(여행 재고)이고 4단계는 여행 금지다. 한국에서 확산세가 꺾이지 않으면 3단계로 올라가고 어쩌면 중국에 이어 입국차단이나 제한 조치가 취해질지도 모른다(이미 15개국이 시행하고 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선을 앞둔 정치적 결정”이라는 식으로 반응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저 자국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방안의 하나일 뿐이다. (※24일 현재 한국에 대한 여행경보를 최고 등급인 3단계로 격상했다)
전문가의 의견 경청해야
착한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주위에서 “하늘도 무심하다”며 한탄하지만 이런 장면을 반복해서 보아 온 의료인들은 질병이 나쁜 사람들만이 걸려야 하는 ‘천벌’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전염병 역시 병원체 가까이 있으면 누구나 걸릴 위험성이 높을 뿐이다. 대한의사협회가 수차례에 걸쳐 중국 체류 외국인 입국을 제한하라고 촉구한 것 역시 입국장에 설치된 열감지 카메라가 잡지 못해 국내에 들어온 잠복기 또는 무증상 감염자 수에 비례해서 전염이 일어나는 빈도가 높아질 거라는 단순한 수식인 ‘전파 속도 = 감염자 수 × 전파 가능 숙주 밀도 × 운(우연)’에 기반한 결론일 뿐이다.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는 ‘신동아’ 3월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2월 14일 진행)에서 “지역 사회 감염 전파가 시작되고 나면 국경 강화의 가치가 뚝 떨어진다”며 “상황을 상대적으로 잘 통제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지금이 골든타임”이라고 말했다. 지금 보면 그때 이미 골든타임을 놓친 시점이다.
23일부터 대구 경북 지역 의료인 100명이 자원해 코로나 환자 치료 현장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난세에 영웅 난다’고 대단한 사람들이다. 위기가 닥치면 결국 기댈 건 실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뿐이다. 미국이 바이러스 유입을 최대한 늦추려고 하는 것도 전문가들이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어떻게 된 건지 한국은 갈수록 전문가들의 의견은 무시되고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비전문가가 중요한 결정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적어도 자연의 비중이 큰 보건, 에너지, 환경의 영역에서만이라도 자연의 무심함(법칙)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상, 출처; 동아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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