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에선 '조센징' 韓에선 '이방인'...고독한 건축가 이타미 준
◆ 제주의 일본 건축가들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사람들은 한동안 '제주 앓이'에 시달린다. 그들은 섬에서 만끽했던 낭만, 평화, 여유를 그리워한다. 제주도 바람, 바다, 돌, 흙 앞에서 여행자의 마음은 푸른빛으로 물든다. 제주도는 언젠간 한 번쯤 느릿느릿 살아보고 싶은 낙원으로 여겨진다.
제주도는 현대건축 경연장이기도 하다. 전 세계 건축가들은 제주 곳곳에 섬의 풍광을 닮은 건축물을 세웠다. 동쪽 섭지코지에 있는 '유민미술관'이 대표적이다. 매표소 입구에 들어선 순간 여정은 시작된다. 전시회 본관까지 가는 길에는 제주 자연을 주제로 한 정원이 있다. 걷다 보면 현무암 돌담이 나온다. 돌담 중간에 가로로 길게 난 창으로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제주 자연을 사려 깊게 반영한 '유민미술관'은 일본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동쪽에 '유민미술관'이 있다면 서쪽엔 '방주교회'가 있다. 바다 위에 떠있는 제주처럼 이 교회도 잔잔한 연못 위에 세워졌다. 수면에 두둥실 떠 있는 조각배 같은 교회다. 지붕은 금속판으로 뒤덮여 있다. 거기엔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 하늘 표정이 담긴다. 연못 수면 위에도 하늘이 어른거린다. '방주교회'를 설계한 인물은 안도 다다오와 함께 일본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이타미 준이다. 그는 일본의 건축가지만 일본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도 예명이다. 진짜 이름은 유동룡이다.
◆ 공항에서 가져온 이름, 이타미 준
지난 8월 15일 국내에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2019)가 개봉했다. 이타미 준의 삶과 건축세계를 여행하는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이타미 준은 바다와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부모는 일제 강점기 때 바다를 건너 일본에 정착한 재일 한국인 1세대다. 그들은 타국에서 자식 여덟 명을 낳았다. 다섯째 자녀 이름을 유동룡으로 지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뿌리를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유동룡은 평생 일본에 귀화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유동룡이라는 이름으로만 살았다.
유년 시절 유동룡은 도쿄에서 열차로 한 시간 거리인 시즈오카현 시미즈에 살았다. 바다 마을 시미즈는 보수적인 동네였다. 조선인은 이방인 중에서도 계급이 낮았다. 유동룡은 '조센징'이라는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단단해졌다. 바다를 보며 울적함을 툴툴 털었다. 감수성 풍부했던 바다 마을 소년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림으론 먹고살기 힘들다"는 아버지 권유에 화가에서 건축가로 방향을 바꿨다. 도쿄의 한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1964년 대학을 졸업했을 당시 일본 경제는 고도 성장기 한복판에 있었다. 호황기에도 유동룡은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한국 이름을 가진 청년을 채용하려는 일본 회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연거푸 취직에 실패한 이타미 준은 동네 카페, 식당 설계로 생계를 이어갔다.
1968년 유동룡은 자신의 건축연구소를 설립했다. 일본 땅에서 유동룡이라는 이름으로 사업하려면 제약이 많았다. 이때부터 그는 이타미 준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오사카에 있는 이타미 공항에서 따온 이름이다. 데뷔작은 어머니 집이었다. 이타미 준은 어머니를 위해 '시미즈 집'을 지었다. 유명 사진작가 무라이 오사무가 이타미 준 데뷔작을 렌즈에 담았다. 건축계에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 조국 땅을 밟기까지 31년
1968년은 홀로서기 외에도 이타미 준에게 중요한 해였다. 그해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인이었던 그가 고국 땅을 밟기까진 31년이 걸렸다. 관념으로만 존재했던 고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흙냄새, 공기, 고요함 등 모든 것이 이타미 준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1968년 이후 이타미 준은 한 달에도 몇 번씩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건축 활동을 한다.
1970년대 일본 경제는 수직 상승했다. 도쿄는 상전벽해 수준으로 변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도심 곳곳에 마천루가 솟아올랐다. 젊은 건축가들은 첨단 신소재를 활용한 빌딩을 설계하며 도쿄의 비상에 합류했다. 이타미 준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자신처럼 재일 한국인이었던 한 화가와 깊게 교류했다. 그는 훗날 점과 선이라는 소재로 거장이 된 이우환 화백이다.
이우환은 1970년대 일본 예술계에서 '모노하 운동'을 이끌었다. '모노하'는 예술 노선인 동시에 철학이었다. 그래서 '모노하'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긴 어렵다. '모노하'는 자연을 도구로 인식하는 서구 근대문명에 의문을 제기한 운동이다. '모노하' 예술가들은 본질 자체를 전면에 내세웠다. 점, 선이라는 기본 요소를 강조해 그림을 그린 이우환처럼 '모노하' 작가들은 '있는 그대로'를 중시했다. 이타미 준도 '모노하'에 심취했다. 그는 돌, 흙, 금속, 유리 등 재료에 담긴 고유의 성질을 드러내는 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 온양 흙으로 지은 온양미술관
이타미 준은 일본의 '모노하'에서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부각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한국에선 자연과 사람을 잇는 조화의 언어를 습득했다. 그는 한국 전통 가옥에 매료됐다. 산 능선을 닮은 한옥 처마 선처럼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물을 짓고자 했다.
1982년 완공한 온양미술관은 이타미 준의 건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충청도 민가에서 영감을 얻어 붉은 벽돌로 미술관을 지었다. 이타미 준은 건축과 지역의 조화를 중시했다. 토착 재료로 건물을 지어 땅이 지닌 역사를 보존하려 했다. 온양미술관에 사용된 벽돌은 모두 인근 지역 황토로 만들어졌다. 이순신 장군 발자취가 가득한 지역 역사는 미술관 지붕에 거북선 모양 구조물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반영했다.
◆ 한국도 따뜻하진 않았다
일본 땅에서 차별과 제약을 무릅쓰고도 유동룡이란 이름을 지킨 이타미 준. 하지만 한국이라고 해서 그에게 너그러웠던 건 아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이타미 준은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온양미술관을 지을 때 이타미 준은 오직 한국만을 생각했다. 온양 흙을 사용하고, 한옥을 모티브로 삼았고, 충무공 정신을 기리고자 했다.
모든 노력은 '왜색'이라는 두 글자로 폄하당했다. 박물관 지붕 곡선은 '일본의 선'으로 의심받았다. 거북선 모양 건물은 "일본군 모자와 닮았다"는 억지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다. 국내 건축계에 이타미 준 편은 거의 없었다. 그는 여러 문화예술계 인사와 교류했지만, 대부분은 재일 한국인들이었다. 이타미 준과 교우한 한국 건축가로는 김중업 정도가 있었다. 독재정권에 직언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추방당한 김중업도 경계인에 가까웠다.
수모는 온양미술관뿐만이 아니었다. 2007년 경주엑스포공원에 세워진 경주타워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건축물이다. 아파트 30층 높이 유리 타워 한가운데가 황룡사 9층 목탑 실루엣으로 뻥 뚫려 있다. 이타미 준은 경주타워 설계 공모전에 참여했었다. 그는 가작 우수상만 받았을 뿐 최종 당선에 들지 못했다. 하지만 완성된 경주타워 모습은 이타미 준이 제출했던 계획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똑같았다. 표절 시비가 붙었다. 수년간 법적 다툼 끝에야 이타미 준은 경주타워 설계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완전히 섞일 수 없었던 이타미 준. 양국 사이에 놓여 있는 푸른 바다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스로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비애감이 파도처럼 일렁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타미 준은 파도 아래로 가라앉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이라면, 그 경계 위에서라도 건물을 짓기로 한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묵묵히 주춧돌을 놓았고, 그 위에 자신의 세계를 쌓아 올렸다.
◆ 바다에서 시작한 삶, 다시 바다로
세상이 이타미 준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평가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2003년 유럽에서 가장 큰 동양 미술관인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서 건축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타이틀은 '이타미 준, 일본의 한국 건축가'였다. 전시회 덕분에 이타미 준의 명성은 크게 뻗어 나갔다. 2005년 프랑스에서 예술 문화훈장 '슈발리에'를 받았고, 2006년 한국에서는 '김수근 문화상'을 받았다. 2010년에는 일본 최고 권위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수상했다. 보수적인 일본 건축계가 이 상을 외국인에게 수여한 건 처음이었다.
바다에서 시작한 이타미 준의 삶은 썰물처럼 저 먼 곳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한국과 일본 사이를 표류했던 그는 마지막 항구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한국이면서도 한국 같지 않은 풍경에서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타미 준은 말년에 제주도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애정을 쏟았다. '방주교회' 인근에는 이타미 준의 또 다른 작품이 모여 있다. 자연을 수집해놓은 '수·풍·석 박물관', 오름을 본뜬 '포도호텔', 산방산을 향해 기도하는 형상의 '두손박물관'이 제주 자연 안에서 숨 쉬고 있다.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온 이타미 준은 이렇게 말했다. "제 미의식의 밑바탕엔 비애라든가 적막함이 있습니다. 소리 뒤에 여운이, 여운 뒤에 무(無)가 이어져요." 우리는 모두 살면서 이타미 준만큼은 아니더라도 종종 경계에 부딪힌다. 출신 지역 때문에, 부모 직업 때문에, 학력 때문에, 나이 때문에, 성별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아닌 온갖 이유로 경계를 감지하고, 위축되고, 쓴맛을 삼킨다.
많은 사람이 제주에서 두 번째 삶을 꿈꾸는 이유는 단지 아름다운 자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주 앓이'의 본질은 눈뜨면 까마득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선 어떤 경계에도 부딪히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리란 믿음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행자의 환상일 뿐이다. 제주라고 해서 왜 고단한 삶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제주에서 휴양지가 주는 기쁨 이상의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이타미 준의 유산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경계를 두지 않은 건축 곁을 천천히 걷다 보면 조금은 위로를 받을지도 모른다.
이상, 출처; 매일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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