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년-종교개혁의 현장을 가다] (상)-마르틴 루터 이전에 얀 후스가 있었다
그 무렵은 새벽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게 1517년. 그로부터 꼭 98년 전이다. 시대의 어둠이 가장 짙을 때였다. 독일 남부의 도시 콘스탄스에서 화형식이 열렸다. 종교개혁을 알리는 새벽닭의 죽음, 주인공은 얀 후스(1369~1415)다. 체코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다. 프라하 대학의 신학부 교수와 총장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당대의 명망가였다. 그런 후스를 화형에 처한 이는 다름 아닌 로마 가톨릭이었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최근 종교개혁지 순례차 독일 콘스탄스를 찾아갔다. 거대한 호수를 낀 채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무척 아름다운 휴양도시였다. 주말이면 스위스 사람들이 물가가 싼 독일로 장을 보러 오는 바람에 교통체증이 일기도 했다.
나는 호숫가로 갔다. 그곳에 360도 회전하는 높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가슴과 허벅지를 드러낸 반라의 여인상. 높이 9m에 무게가 18톤이다. 여인은 당대 최고의 미모로 꼽히던 콘스탄스의 창녀다. 그녀의 양손에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왼손에는 삼층관을 쓴 교황이, 오른손에는 왕관을 쓴 황제다. 둘 다 벌거숭이다. 교황은 다리를 꼬고 있고, 황제는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호숫가의 창녀 동상은 600년 전의 시대상을 폭로하고 있었다. 당시 교황은 무려 세 명이었다. 교황청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 두 곳이었다. 서로가 “내가 진짜 교황”이라고 정통성을 주장하며 치고 박고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면벌부)를 판매하며 타락한 채 분열돼 있었다.
후스는 그런 교회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서 칼을 겨누었다. 타깃은 ‘교황’이었다. 후스는 “면죄부(면벌부)를 파는 교황은 가롯 유다와 같다”고 선언했다. 유다는 예수를 유대인에게 팔아넘겨 결국 숨지게 한 인물이다. 그런 유다에 교황을 빗댔다. 중세 암흑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지를 수 없는 도발이었다.
나는 호수 위에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동상 앞으로 갔다. 장관이었다.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창녀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겉을 보면 성(聖)과 속(俗)의 만남이지만, 들추어 보면 욕(欲)과 욕(欲)의 만남에 불과했다. 후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콘스탄스의 푸른 호수에는 예쁘고 아담한 요트들이 떠 있었다. 600년 전, 후스도 이 자리에서 저 풍경을 바라봤다. 그가 바라본 호수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으리라.
당시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모두 라틴어로 진행됐다. 서민들은 라틴어를 몰랐다.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몰랐다. 그저 성당에 가서 사제가 읽는 라틴어 성경을 뜻도 모른 채 들을 뿐이었다. 강론도 그랬다. 라틴어로만 진행되는 강론은 그저 알아 듣지 못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중세 때 라틴어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후스는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설교를 했다. 라틴어 대신 체코의 언어를 택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자신들의 모국어로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성서의 메시지에 환호했다. 게다가 후스는 체코어로 성서까지 번역했다.후스는 대신학자이자 대설교가였다.
콘스탄스의 호숫가에는 지금도 거대한 저택이 한 채 있었다. 600년 전, 이곳에서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최고결정기관이다. 가톨릭에 교황이 셋이나 되고 대립이 심해지자 지기스문트(1368~1437)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공의회는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후스를 콘스탄스 종교재판에 소환했다. 주위 사람들은 말렸다. “가면 죽일 것이다” “절대 가지 마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지기스문트 황제가 안전을 보장했다. 황제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이땅에서 이단 정죄(定罪)가 사라지게 만들겠다”며 신변 보장을 약속했다. 후스는 콘스탄스로 갔다. 그러나 체포돼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나는 후스가 갇혔던 수도원 건물로 갔다. 지금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후스가 석 달간 갇혔던 성탑처럼 생긴 감옥은 남아 있었다. 후스는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다. 낮에는 쉼없이 걸어야 했고, 밤에는 벽에 묶여 있어야 했다. 누울 수가 없었다. 당시 후스는 지독한 치질과 두통으로 고통을 겪었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후스를 정조준한 핵심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예수에게서 부여받은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었다. 신약성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장 13~19절) 이 구절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는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대를 잇는 교황들마다 예수가 직접 부여한 ‘반석의 권위’가 있다고 믿는다. 그 위에 교회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반석’을 베드로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봤다. 신의 속성을 온전히 공유하는 예수의 속성. 그게 바로 ‘하느님(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후스는 그런 속성이야말로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후스의 해석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가톨릭 교회 체제의 뼈대가 무너질 판이었다. 결국 후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1415년 7월 16일, 토요일 아침이었다. 후스는 사형장으로 끌려나왔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서도 후스는 황제를 향해 종교개혁의 절박함을 역설했다. 황제는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런 말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공의회의 주최 측은 왕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였다. 후스를 어떻게 처리할 지도 교회의 권한이었다.
사실 100년 후에 마르틴 루터도 후스와 똑같은 곤경에 처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 오라는 요청이었다. 주위에서는 다들 말렸다. 가면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고 했다. 고심 끝에 루터는 제국회의에 참석했다. 황제와 추기경들 앞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런데도 화형을 당하지 않았다. 제국회의의 주최 측이 교회가 아니라 제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후들은 굳이 루터의 목숨을 앗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콘스탄스 공의회의 주최 측은 제후가 아니라 교회였다.
종교재판소에서 “입장을 번복하면 파문을 면하고 목숨을 구할 것”이라는 마지막 제안을 받았지만 후스는 거절했다. 그는 “내 입장을 번복하면 신 앞에서 죄가 될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후스의 머리카락은 면도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깎였다. 머리에는 고깔 모자를 씌웠다. 거기에는 ‘Hic est heresiarcha(이 자가 이단의 두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후스를 향한 조롱이었다.
나는 콘스탄스 호숫가의 부두를 거닐었다. 호수 가운데 솟은 말뚝에 가마우지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후스가 갇혔던 감옥은 불과 5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땅에서 맞았던 마지막 밤. 후스는 감옥의 창을 통해 호수 위로 떠오른 달이라도 보았겠지. 그 달을 보며 후스는 기도를 올리지 않았을까.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 주일을 하루 앞둔 날,‘회개하지 않은 이단자’ 후스는 불타야 했다. 날이 밝았다. 후스는 나무기둥에 몸이 묶였다. 주위에는 짚과 장작이 놓였다. 후스가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이다. 생전에 후스는 자신을 종종 거위에 빗댔다. 후스가 예견한 ‘백조’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그 백조가 100년 후에 등장하는 ‘마르틴 루터’라고 해석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태워도, 아무리 삶아도 거스를 수 없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다. 그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서 있었다. 후스는 파문과 함께 죽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톨릭 사제)가 파문당하기 100년 전에 말이다. 개혁을 부르짖던 후스의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당시에는 인쇄술도 없었다.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하던 시절이었다. 인쇄술 혁명의 덕을 톡톡히 본 루터와 달리 후스의 저술은 널리 퍼져나가지 못했다.
후스가 죽고서 105년이 흘렀다. 1520년 2월에 후스의 저술을 읽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종교개혁의 여명기, 거기에는 얀 후스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 이전에 말이다.
이상,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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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현장을 가다(중)-독일 아이슬레벤
독일에는 ‘루터의 도시’가 둘 있다. 그가 나고 죽은 아이슬레벤과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비텐베르크다. 비텐베르크에는 파문당한 루터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루터 하우스가 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두꺼운 나무로 짠 아주 오래된 함(函)이 하나 있었다. 단단한 철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위쪽에는 동전을 넣는 구멍도 있었다. 종교개혁을 촉발한 도화선, 면죄부 함이었다.
당시 테첼이라는 가톨릭 수도사는 “금화가 면죄부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설파했다. 그가 도시를 돌아다니며 이런 설교를 할 때마다 면죄부 판매는 성황을 이루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중세 때는 달랐다. 사람들은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때는 인쇄술도 없었다. 책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손으로 일일이 필사를 해야 했다. 책 한 권 필사하려면 족히 두 달은 걸렸다. 게다가 성경은 라틴어 성경뿐이었다. 성직자나 학자들만 읽을 수 있었다. 수도원의 수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 라틴어 성경을 필사하는 일이었다.
필사본 성경의 가격도 엄청났다. 농장을 하나 팔아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두꺼운 종이에 필사한 책이라 부피도 굉장했다. 성경 66권을 보관하려면 커다란 서가가 필요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성경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수도원도 드물었다. 라틴어도 모르고 돈도 없는 서민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가질 수도 없었다. 테첼 같은 수도사가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황당한 주장을 해도 당연히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여겼다. 성경의 메시지는 오직 성직자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면죄부 함 앞에 섰다. 눈을 감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돈을 넣었을까. 그리고 기도했을까. 구원받게 해달라고. 천국행 티켓을 얻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까.’ 궁금했다. 중세 암흑기의 굴절되고 왜곡된 종교적 풍경이 과연 ‘2017년 한국 교회’와는 무관한 것일까. 행여 면죄부 함이 헌금함으로 이름만 바꾼 것은 아닐까. 지금도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못 본 척하며 ‘천국행 티켓’만 좇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오늘날의 면죄부’만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종교개혁사에서 마르틴 루터(1483~1546) 이전에 체코의 얀 후스(1369~1415)가 있었고, 후스 이전에 영국의 존 위클리프(1320~1384)가 있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ㆍ철학부 교수였다. 당시 유럽은 아수라장이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1348~50년에만 무려 2500만~3500만 명이 사망했다. 유럽 인구의 30%가 죽어갔다. 그런데도 교회는 타락한 채 권력욕과 면죄부 판매에만 열을 올렸다. 위클리프는 “그리스도는 가난하게 살았다. 이 땅의 권세를 거절했다. 그런데 교황은 그걸 갖지 못해 안달이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교회의 머리다.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화신이다.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리려는 죄인이다”고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뿐만 아니었다. 위클리프는 “누구나 성경을 탐구할 권리가 있다”며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들을 모아 라틴어 성경을 모두 영어로 번역했다. 결국 ‘이단’으로 몰린 위클리프는 대학에서 쫓겨났다. 위클리프는 이단 선고를 받고서 연설을 하다가 쓰러져 죽었다. 그가 죽자 콘스탄츠 공의회는 무덤에서 그의 시신을 다시 파내 화형에 처했고, 재를 강물에다 뿌렸다. 당시에는 유골이 부서지면 다시 부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루터하우스 안에는 당시에 썼던 벽난로와 나무 테이블 등이 놓여 있었다. 루터는 저 옆에서 불을 쬐며 위클리프와 후스의 정신을 고민했으리라. 종교개혁의 여명기. 어둠은 짙고, 또 길었다. 새벽을 미리 알고 울던 선각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많은 위클리프파와 후스파가 루터 이전에 처형을 당했다.
나는 독일의 아이슬레벤으로 갔다. 루터가 태어나고 죽은 곳이다. 예전에는 동독 땅이었다. 아이슬레벤 시 청사 앞에는 루터의 동상이 서 있었다. 통독 직전에는 그곳에 동독인들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업자였다.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루터는 폭풍우 속에서 벼락을 만났다.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했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던 루터는 그때 “살아난다면 수도자가 되겠다”며 성 안나(광부들의 수호 성인)에게 약속했다. 목숨을 건진 루터는 아버지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자가 됐다. 루터의 벼락체험. 나는 그게 ‘두려움’이라고 본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갖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불안이다. 벼락을 통해 그걸 체험한 루터는 결국 자기 삶의 방향을 틀었다. 루터는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가 머리를 깎고 수도자가 됐다.
나는 궁금했다. 종교개혁가 이전에 루터는 가톨릭 수도자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무려 15년을 보냈다. ‘수도자 루터’의 삶은 어땠을까. 그것이 그의 종교개혁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런 물음을 안고서 나는 에어푸르트로 갔다. 그가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루터는 꽤 고지식한 편이었다. 원칙을 엄수하는 스타일이었다. 수도원의 겨울은 춥다. 불을 때지 않는다. 온기가 있는 공간은 부엌이 유일하다. 루터는 고행을 자처했다. 한겨울에 담요만 덮어쓴 채 3일씩 금식하기도 했다.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1분도 채 안돼 뛰어가 고해성사를 다시 하곤 했다. 그걸 수차례나 되풀이했다. 오죽하면 담당 사제가 “제발 나가서 제대로 된 죄를 짓고 다시 오라”고 했을까. 그만큼 루터는 죄에 대한 강박증이 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고해소(告解所) 바로 앞에는 아예 ‘루터의 계단’이 있었다. 고해성사를 마친 루터가 이 계단을 다 오르기 전에 다시 뛰어가 고해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루터는 왜 그랬을까. 당시 교회가 내세우는 신은 ‘심판의 하느님(하나님)’이었다. 교회는 끊임없이 ‘죄’를 강조했다. 죄를 강조할수록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그래서 구원에 매달린다. 사람들이 구원에 매달릴수록 면죄부가 많이 팔린다. 결국 교회의 힘과 영향력이 커진다.
어찌 보면 1500년 전과 지금은 닮았다. 요즘도 적지 않은 목회자가 ‘죄를 강조하는 마케팅’에 몰두한다. ‘죄 짓는 인간과 심판의 하나님’이란 대립적 구도를 유달리 강조하며, 신자들 내면의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에 불을 붙이고 부채질한다. 그러니 “면죄부를 사면 구원을 받는다”는 중세 때 주장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요즘 주장은 어떤 면에서 상통한다. 만약 거기에 ‘자기 십자가’가 빠져 있다면 말이다.
루터는 절망했다. 그는 ‘심판의 하나님’을 미워했다. 심지어 “원죄로 인해 영원히 저주받은 죄인들에게 십계명의 율법으로 다시 억압하는 하나님을 나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고백까지 했다. 훗날 루터는 로마서를 읽다가 깨달았다. 인간이 쌓아가는 의(義)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義)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짐을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걸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라고 표현했다. 이게 루터 신학의 핵심이다.
요즘 사람들은 루터의 ‘오직 믿음’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고, 십일조를 하고, 다른 종교에 눈을 돌리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오직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교회만 나가면 ‘오직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도대체 ‘오직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건 ‘눈’을 빼는 일이다. 나의 눈, 에고의 눈을 빼는 일이다. 예수는 그걸 ‘자기 십자가’라고 불렀다. 그렇게 ‘눈’을 빼며 나(예수)를 따르라고 했다. 그게 ‘전적인 항복(Total surrender)’이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보여준 것도 ‘전적인 항복’이었다. 왜 그럴까. 그럴 때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의(義)’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다. 그럼 ‘하나님의 의(義)’는 무엇일까. 신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함이다. 그러니 ‘에고의 눈’을 갖고서 그 속성에 부합하긴 어렵다. ‘에고의 눈’이 빠질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속성으로 녹아든다. 그게 ‘체다카’다. 루터의 ‘오직 믿음’에 담긴 깊은 영성이다. 해가 떨어졌다. 종교개혁 순례의 여정은 이제 ‘루터의 혁명적 삶’을 향하고 있었다.
이상,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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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년, 현장을 가다](하) 마르틴 루터는 왜 16세 연하의 수녀와 결혼했나?
마르틴 루터는 고민했다. 고해성사를 하는 이들이 갈수록 줄었다. 이유를 알아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면죄부(면벌부) 때문이었다. 루터가 살던 시골 도시 비텐베르크에서는 면죄부를 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웃 도시까지 가서 면죄부를 구입해 왔다. 그들은 더 이상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 면죄부를 가졌으니 죄에 대한 벌을 이미 면제받았다고 여겼다.
루터는 당시 가톨릭 사제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았다. 면죄부 판매 수익은 교황청이 로마의 베드로성당 건축비로 사용했다. 아니면 대주교가 되기 위한 고위 성직자의 뇌물 자금 등으로 쓰였다. 루터는 문제를 제기했다. 처음부터 교회를 엎어버릴 생각이 아니었다. 신학자였던 그는 “신학적으로 토론이나 한번 해보자”며 손을 들었다.
나는 비텐베르크로 갔다. 그곳에 루터가 살았던 성당이 있었다. 루터 당시에는 함께 토론하고 논쟁할 거리가 있으면 교회 정문에 ‘대자보’를 붙이는 전통이 있었다. 그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읽고서 즉석에서 토론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도 성당의 정문에 라틴어로 ‘대자보’를 붙였다. 이른바 ‘95개 논제’였다. 그날이 ‘종교개혁 500주년’의 기점이 되는 날이다. 나는 ‘95개 논제’를 일일이 읽어보았다. 수도원에서 15년간 생활하며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하느님(하나님)’에 절망하던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수도원 꼭대기 탑방의 화장실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주창했다. 루터는 그 눈을 갖고서 95가지 물음을 던졌다.
‘95개 논제’를 읽다가 나는 적잖이 놀랐다. 루터가 겨눈 것은 ‘500년 전의 유럽’이었다. 그런데 마치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겨눈 것처럼 루터의 창은 매섭고, 또 날카로웠다. 루터는 ‘95개 논제’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부자보다 더 부유한 교황이 왜 자신의 돈으로 거룩한 베드로 교회를 건축하지 않고, 훨씬 더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건축하는가?” “평화가 없는데도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평화, 평화’라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져라.” “십자가가 없는데도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십자가, 십자가’라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져라.”
5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오늘날 교회에도 ‘말로 하는 평화, 말로 만든 십자가’가 넘친다. 중세 때만 교회 건축으로 승부를 걸었던 게 아니다. 지금도 일부 목회자는 영성의 갈무리 대신 교회의 건물을 올리며 승부수를 던진다. 신축 과정에서는 예산 집행의 투명성 등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전’이라며 집행된다.
어쩌면 루터가 겨눈 것은 ‘500년 전의 유럽’이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안에 도사린 욕망일지도 모른다. 반 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면죄부’를 갈망한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대신 ‘천국행 티켓’을 구매하고 싶어한다. 이런 욕망을 과연 중세의 교회만 이용했을까. 요즘도 적지 않은 교회가 자기 십자가를 생략한 채 공짜 구원만 강조하며 ‘현대식 면죄부’를 팔고 있는 건 아닐까.
비텐베르크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설교단 아래 루터의 묘가 있었다. 거기에 루터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루터의 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묘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루터가 ‘95개 논제’는 순식간에 퍼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덕분이었다. 수천 부의 사본이 유럽 전역에 퍼졌다. 독일 시골 도시의 보잘 것 없는 사제 교수가 써붙인 종이 한 장이 ‘중세의 뇌관’이 됐다. 대자보를 써붙인 지 3년 후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6월 15일자로 루터에게 교서를 발송했다. 일종의 ‘파문 경고장’이었다. 교황은 “멧돼지 한 마리가 주님의 포도밭을 짓밟고 다닌다”며 루터의 저술을 불태우게 했다. 그리고 41개 항의 오류를 지적하며 60일 안에 ‘95개 논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루터는 맞받아쳤다. 교황의 교서를 참나무 아래서 태워버렸다. 공개적인 장소였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았다. 그건 가톨릭 사제였던 루터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순간이었다. 나는 비텐베르크 입구의 그 참나무를 찾아 갔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루터의 참나무’라고 불렀다. ‘저 나무는 보았겠지. 교황의 교서를 태우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던 루터의 심정을 말이다.’
예수 이전의 구약 시대에도 제사장이 있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족만 성막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은 양을 키우지도 않고 농사를 짓지 않아도 제물을 받는 특권층이 됐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 제사장 그룹은 그랬다. 중세 유럽에선 가톨릭 성직자들이 그랬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서만 말씀을 듣고, 기도를 했다. 종교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계급’이었다.
그런 시대에 루터는 혁명적 주장을 했다. 이른바 ‘만인 제사장론’이다. 나와 예수, 나와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징검다리도 필요 없다고 했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도 신을 만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너도 제사장이고, 나도 제사장이다. 그렇게 만인이 제사장이라고 했다. 그게 루터의 정신이다. 그럼 오늘날은 어떨까. 성직자와 평신도, 그 사이에 아무런 문턱이 없을까. 행여 오늘날의 목회자가 그 옛날의 제사장이 돼 있는 건 아닐까.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다. 그리고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했다. 항복을 받아내고자 했다. 루터는 고민했다. 콘스탄스 공의회에 갔다가 화형을 당한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처지가 될지도 몰랐다. 루터는 결국 보름스로 갔다.
나는 버스를 타고 보름스로 갔다.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 사이의 도시였다.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는 500㎞였다. 제국의회는 루터에게 ‘철회’를 요구했다. 루터는 당당했다. 황제와 제후와 추기경들 앞에서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을 수 없다. 저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어떠한 것도 취소할 수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양심에 반해 행동하는 건 구원을 위협하는 일이다”라고 일갈했다.
보름스 제국의회가 끝나자 루터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작센의 제후였던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숨겨 주었다. 루터는 산악지대인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지냈다. 수염을 기른 채 기사 신분으로 위장했다. 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고 골방에서 10개월간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나는 아이제나흐로 갔다. 버스로 10분 정도 산길을 올랐다. 울창한 산 속에 바르트부르크 성이 나타났다. 웅장했다. 성 안으로 들어갔다. 루터가 지냈던 골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썼던 책상과 의자, 벽난로도 있었다. 벽에는 루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여윈 얼굴에 수염을 기른 루터. 그의 눈빛에서 ‘양심을 향안 의지, 진리를 향한 의지’가 읽혔다.
루터는 이곳에서 편지도 썼다. 편지 말미에는 ‘광야에서’또는 ‘밧모 섬에서’라고 적었다. 광야는 예수가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와 싸웠던 곳이다. 에게해의 밧모 섬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썼던 감옥이다. 그러니 이 성의 골방이 루터에게는 감옥이자, 광야이자, 신의 음성을 듣는 곳이었다. 당시 루터는 육체적 고통과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독일어로 성경 번역을 했다. 1534년에 출간된 루터의 신ㆍ구약 독일어 성경은 무려 50만 부 넘게 팔렸다.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성에서 나와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수녀원에서 탈출한 16세 연하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사제 출신과 수녀 출신의 만남, 둘은 종교개혁의 동지였다. 루터에게도 오점은 있었다. 1525년 독일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루터는 무력진압을 강하게 주장했다. 무려 10만 명의 농부들이 학살됐지만 루터는 제후들 편에 섰다. 봉건적 시대 상황과 얽힌 루터의 한계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하며 생각했다. 종교는 늘 개혁을 요구한다. 예수 당시에도 그랬고, 루터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왜 그럴까. ‘종교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 명분이 되고, 수단이 된다. 버스 창 밖으로 날이 저물었다. 순례의 마지막에 나는 루터의 어록을 묵상했다. “우리의 권능이 들어올 때 하나님의 권능이 나가고, 우리의 권능이 나갈 때 하나님의 권능이 들어온다.” 그러니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울 것인가.
이상, 출처; 중앙일보
news.joins.com/article/2189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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