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줄거리에는 이렇다 할 사건들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나는 1869년 12월 마지막 날 북부 프랑스의 르카토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상인이었던 나의 선친은 아들이 법관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나는 열여덟살에서 스물두살까지 생캉탱의 한 법률사무소 서기로 충실하게 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섬유디자이너 양성학교가 있었다. 그림과 데생에 흠뻑 빠져든 나는 매일 아침, 심지어는 겨울철에도, 수업을 듣기위해 7시와 8시 사이에 일어났다. 결국 부모님은 법학을 그만두고 파리에 가서 그림공부를 해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1921년 쓴 편지에 나오는 이 대목은 앙리 마티스(1869~1954)가 자기 삶에 대해서 들려주는 이야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률사무소 서기로 일하던 중 맹장염에 걸려 수술 후 보앵에서 회복기를 갖고 있던 마티스는 한 이웃의 권유로 어머니가 건네준 물감통을 들고 나가서 물방앗간과 마을 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마치 고증서를 옮겨 적듯이 꼼꼼히 베껴 그렸다. 그의 나이 스물한살때인 1890년 6월 ‘책이 있는 정물’을 완성했는데, 그가 나중에 ‘나의 처녀작’이라 부른 이 작품의 정확성을 과시하기 위해 서명도 ‘스티마 H’라고 거울에 비친 형태로 적어 넣었다.
사업가인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화가로 전향한 마티스는 ‘야수파의 왕자’ ‘색채회화의 아버지’ 또는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20세기 미술의 거장으로 100년이 넘은 후대에도 빛을 발하는 많은 걸작품들을 남겼다.
마티스의 고향 캉브레지는 벨기에에 인접한 프랑스 북부 변경으로 산업화의 거센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무자비한 토지개발로 풍차와 종루가 평화로이 늘어서있던 숲은 어느새 사라지고,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들어서면 고향 풍경은 점차 잿빛으로 물들어간다. 이처럼 기억속에 남아있는 고향은 모습은 밝고 푸른 정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 훗날 마티스는 1941년 평론가 쿠르숑과의 대화에서 “대 작업의 주요 목적은 명료한 빛을 획득하는 것”이라 말했다.
임근혜(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씨는 ‘마티스의 생애와 예술에 대하여’ 서문을 통해 “19세기 말 격변기의 침울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마티스의 유년시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 이전부터 빛의 가치를 사무치도록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깨달음이 그를 ‘영혼의 빛을 발산하는 찬란한 색채의 화가’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라 말했다.
마티스는 1892년 파리 장식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미술학교 수험준비를 하면서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부그로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던 중 G. 모로의 눈에 띄어 그의 미술학교 교실로 입학하였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재질이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1896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출품한 ‘독서하는 여인’을 국가가 매입하게 되자 이 전람회의 회원이 되었다.
한편 예술적으로는 드랭을 통하여 블라맹크를 알게되고, 1904년 시냐크ㆍ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즘)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났다. 드랭ㆍ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근대미술의 태동을 알리는 첫번째 미술사조로 이어지는 20세기 미술의 혁명의 시대를 예고하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이상, 출처; 서울경제
[기업, 미술과의 대화] H. 마티스 그는 누구인가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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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우정과 경쟁/잭 플럼 지음·이영주 옮김
“아아, 우리의 말이 이 그림에 앞서 만들어진 까닭에 어떤 문학도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언어!”(기욤 아폴리네르)
1907년 파블로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공개했을 때 그것이 현대회화의 위대한 이정표가 되리라고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화단은 이 20세기의 가장 거친 그림에 질겁했다. 친구들조차 목을 맨 피카소를 발견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슬슬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당대에, 그리고 그 후에도 피카소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앙리 마티스.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이 그림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자신의 대작 ‘삶의 환희’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삶의 환희’가 곡선적이고 원기왕성하며 밝게 채색돼 있다면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모나고 거칠며 단색이었다. 마티스의 작품이 목가적 배경 속에 매우 천진하고 에로틱한 몽상을 나타내며 삶의 즐거움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면 피카소의 그림은 현대 도시의 매음굴을 소재로 성적인 외상(外傷)과 죽음의 대면을 암시하고 있었다. 피카소의 그림은 ‘삶의 불행’을 절규하며 마티스의 ‘삶의 환희’가 가당치 않음을 선언하고 있었다. 피카소는 파괴와 창조, 폭력과 현대성을 급진적으로 결부시켰다. 마티스는 그 여과되지 않은 관능, 그 폭발적이고 분열적인 에너지에 아찔했다. 생전 처음 마티스는 피카소가 자신보다 훨씬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20세기 미술의 두 거장, 마티스와 피카소.
두 사람은 어느 한 순간도 상대방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1905년 스타인가(家)의 후원을 놓고 처음 겨루었던 그 순간부터 반목하고 견제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사후에도 계속된다. 흔히 그들의 관계는 이분법의 대립 쌍으로 비유된다. 색채와 형태, 부르주아적 삶과 보헤미안적 삶, 낮과 밤, 냉정과 열정, ‘교수님’과 ‘어릿광대’….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 책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경쟁과 우정을 새롭게 조명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 영감과 자극을 주었는지, 서로의 작품에 대한 반응이 그들의 예술에 어떻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는 동시에 서로에게 저항했다. 그들은 상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자기 안에서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마티스는 “우리가 상대로부터 이익을 얻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토로했다. 그들의 서로 다른 행로에는 호혜적인 ‘상호침투’가 있었다. 피카소는 특히 ‘마티스적 요소’를 차용하기를 즐겼다. 피카소의 ‘기대어 누운 누드’는 ‘푸른 누드’의 자세에서 착안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색채, 싹트기 시작한 식물과 과일, 율동적인 장식 문양은 모두 마티스가 좋아하는 장치들이다. 피카소가 애인 프랑수아즈 질로를 그린 ‘여인-꽃’은 ‘마티스 부인의 초상’을 연상시킬 뿐 아니라 “내가 만약 그녀를 그린다면 머리카락을 초록으로 하겠다”던 마티스의 말에서 직접 모티브를 얻었다. 이 때문에 마티스는 언제 어느 때 피카소에게 자신의 주제와 제재를 도용당할지 모른다는 피해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매복하고 기다리는 노상강도야!”
피카소는 밤에 그리고, 마티스는 낮에 그렸다. 마티스의 그림에서는 강렬한 햇빛이 느껴지는 반면 침묵하는 단색조에 가까운 피카소의 작품은 거의 촛불이 비치는 듯하다. 마티스의 작품은 ‘오렌지처럼 터질 듯한 빛으로 가득한 과일’과 같았고 피카소는 ‘신비스럽게 빛나는 진주’였다. 누가 더 위대한 화가인가. 직접적이고 서사적인 피카소의 작품에 비해 마티스의 그림은 단순한 형상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심원하고 난해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그는 매력적이지만 깊이 없는 ‘편안한 안락의자의 화가’로 비쳤다. 마티스의 예술에는 ‘게르니카’와 같은 정치적 우의(寓意)가 없었으니,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는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위대한 예술가로 선택받았다는 느낌은 피카소에 비해 상당히 위축되었고, 오랫동안 유예되었다. 르네상스 전성기에 시작된 회화 전통의 끝에 서 있었던 마티스와 피카소. 아마도 우리는 새로운 세기가 두 사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누가 더 위대한 화가인지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매우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으며, 그들의 예술은 우리에게 아주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걸어 왔다….”
이상, 출처; 동아일보
[문학예술]피카소와 마티스…‘세기의 우정과 경쟁’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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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마리 수녀가 된 부르주아는 마티스에게 새로 짓는 예배당 설계를 부탁했고 그는 생애 처음으로 건축 설계를 비롯해 실내장식 일체를 도맡아 4년 동안 작업에 몰두했다. 1951년 마티스가 ‘내 생애 최고의 걸작’으로 꼽았던 로제르 예배당이 문을 열었을 때 프랑스 언론은 “화가와 수녀의 만남이 예배당을 탄생시키다”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했다. 마티스는 예배당을 완성시킨 최고의 협력자로 마리 수녀를 꼽았으며 예배당이 두 사람의 “공동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그들의 애정 관계를 묻는 질문에는 “우리 사이에 일어난 일은 꽃의 소나기와 같다. 우리는 서로에게 던지는 장미 꽃잎이다”라고 즉답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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