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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드라클르아, 낭만주의의 선구자

BK(우정) 2019. 1. 9. 16:54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미술계를 평정한 화풍은 경건한 신고전주의였다. 그리고 그 대변자는 완벽한 초상화로 명성을 떨친 앵그르였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대적할 자가 없을 것만 같던 신고전주의에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 젊은 화가가 등장한다. 낭만주의의 선두주자가 될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년)다. 그도 원래는 앵그르의 스승이자 신고전주의를 선도한 자크 다비드 화풍을 이어받은 선생에게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선을 중시하는 신고전주의의 딱딱한 느낌을 버리고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색채와 유려하고 자유로운 붓질로 자신만의 화풍을 창조했으니, 바로 낭만주의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e guidant le peuple, 1830년)’. ‘1830년 7월 28일’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왕정복고에 반대한 시민들의 목숨을 건 7월의 시가전을 주제로 하고 있다. 현실적 주제에 상상력을 결합한 이 작품을 통해서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화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는다.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갓 스물을 넘긴 나이부터 들라크루아는 뛰어난 솜씨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이내 앵그르는 새로운 화풍을 창조한 성가신 어린 경쟁자가 등장했음을 눈치챘다. 오죽하면 그의 그림을 보고 “양떼들 사이로 늑대를 풀어놨다”고 한탄했을까. 고요하고 평온한 자신의 정돈된 화풍과는 정반대로 들짐승처럼 훈련되지 못했다는 비아냥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간에서 젊은 경쟁자 그림에 흘러넘치는 야생의 생명력에 대한 노익장의 견제와 질투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들라크루아가 서른에 완성한 대작 ‘사다나팔루스의 죽음(La Mort de Sardanapale, 1827~1828년)’을 보면 앵그르의 질투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작품은 들라크루아가 평소 존경하던 바이런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이다. 아시리아 왕 사다나팔루스의 하인과 첩들을 닥치는 대로 잔혹하게 학살하는 호위무사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정작 명령을 내린 왕은 침대에 편안하고 느긋하게 기댄 채, 그들의 처참한 죽음을 태평하게 관망하고 있다. 화면 맨 앞, 곧 목이 잘릴 위기에 처한 벌거벗은 여자의 뒤틀린 모습이 그림의 드라마틱한 요소를 극대화한다.

그런데 처음에 얼핏 이 그림을 보면 한껏 달아오른 여흥을 즐기는 퇴폐적인 장면처럼 보이지 않는가. 등장인물들을 독립적인 선으로 묘사하기보다는 화려한 색채 속에 한데 어우러지게 그렸기 때문이다. 그가 네덜란드 바로크 거장 루벤스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누드의 여성들과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구성까지 더해져 이 그림의 폭력적인 주제는 첫눈에는 잘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극히 잔인하고 처절한 죽음의 현장임을 알 수 있다. 성적 욕망 에로스와 죽음을 향하는 타나토스가 흐드러지게 어우러진 이 작품은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주제 때문에 완성된 후 오랫동안 전시되지 못했다.

 

‘사다나팔루스의 죽음(La Mort de Sardanapale, 1827~1828년)’. 들라크루아가 존경하던 바이런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 에로스와 타나토스적 욕망이 한데 어우러져 드라마틱한 요소를 극대화한 그림으로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이외에도 들라크루아는 셰익스피어, 괴테 등의 여러 문학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그림을 다수 그렸다. 그렇다고 그가 문학적 상상력만 발휘한 것은 아니다. 주요 정치 사건들도 그의 중요한 작품 주제 중 하나였다. 그 대표작으로 들라크루아에게 명성을 안겨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e guidant le peuple, 1830년)’을 꼽을 수 있다. ‘1830년 7월 28일’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프랑스 ‘7월 혁명’을 주제로 하고 있다. 왕정복고에 반대한 시민들의 목숨을 건 시가전을 묘사했다. 문학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실제 시가전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화가가 상상력을 동원해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국기를 휘날리며 민중을 이끄는 여인은 실물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국가적 상징물인 자유의 여신, 마리안이다. 이 작품 역시 삶과 죽음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도 극적 구성과 유려한 붓질에 의해 유기적으로 통합돼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명성을 굳건하게 다진 들라크루아는 1832년, 알제리 정복을 기념하는 외교사절단 소속으로 파견돼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각지를 여행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린다.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낯선 문화를 늘 동경하며, 문명화된 도시 파리에서 벗어나기를 꿈꿔온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기회였다. 이방인과 그들의 이국적인 의상, 생활상 등 모든 것이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평생 다루게 될 야생동물 그림의 풍부한 원천을 제공한 것도 이 여행이다.

들라크루아에게 야생동물이라는 주제는 언제나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표출하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특히 호랑이는 그가 큰 애착을 느낀 주제 중 하나였다. 그에게 호랑이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이국 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늘 도시 탈출을 꿈꾸던 그는 파리의 식물원과 동물원을 즐겨 찾았다. 마음속의 영원한 멘토, 루벤스의 ‘호랑이 사냥’(1615~1616년) 같은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이전에도 호랑이 그림을 그리고는 했다. 그의 ‘호랑이 사랑’은 1847년, 파리동물원이 아시아 지역에서 들여온 호랑이를 선보이면서부터 더욱 본격화됐다. 밀림의 당당한 지배자였던 호랑이가 우리 안에 갇힌 서글픈 모습은 들라크루아의 풍부한 감성을 자극했다. 우리 속 호랑이 모습에 자신을 투영, 화가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자유를 향한 억눌린 욕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거북이를 가지고 유희하는 호랑이(Tigre jouant avec une tortue, 1862년)’. 야생동물을 주제로 한 들라크루아의 말년작. 2018년 5월, 크리스티 뉴욕의 록펠러 소장품 경매 출품작 중 하나로 987만5000달러(약 112억원)에 낙찰돼 들라크루아 작품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 낙찰가를 기록했다. ⓒ 2018 Christie`s Images Limited.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석유 재벌 록펠러 가문의 3세, 데이비드와 그의 아내 페기 록펠러도 들라크루아의 호랑이 그림 가운데 ‘거북이를 가지고 유희하는 호랑이(Tigre jouant avec une tortue, 1862년)’라는 작품을 소장했다. 들라크루아가 지병으로 죽기 한 해 전에 그려진 이 말년작은 초기의 다소 폭력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이 많이 누그러져 보다 개인적이고 내향적인 취향을 반영한다. 작고 연약한 먹잇감과 이를 노리는 막강한 포식자의 대면 순간을 포착, 생생하게 표현했다. 호랑이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거북이가 꼼짝달싹 못하게 살짝 눌러놓은 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이 낯선 생명체를 어찌할까 고민하는 듯 보인다. 멀리 보이는 풍경은 거의 추상에 가깝게 처리돼 있다. 흐르는 듯 신속하고 유연한 붓질로 땅, 산과 하늘의 경계를 형성하며 조화로운 색채를 통해 능숙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뛰어난 테크닉은 19세기가 낳은 위대한 색채가로서의 들라크루아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은 2018년 5월 8일, 크리스티 뉴욕에서 진행된 록펠러 컬렉션 경매에서 약 990만달러(약 112억원)에 낙찰돼 들라크루아 작품 가운데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그의 대형 작품들은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어서 시장에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고, 소품으로 그린 동물 그림들이 주로 경매에서 다뤄진다. 소품에서도 들라크루아의 풍요로운 상상력은 잠들지 않는다. 끝없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유기적이고 표현적인 붓질과 색채의 시각적 효과에 대한 그의 탁월한 이해 덕분에 야생동물에 관한 관찰과 탐구는 드라마틱한 사냥이나 전쟁 장면, 또는 한가로운 유희 장면 등으로 다채롭게 탈바꿈한다. 이미 그의 작품 속에서 다음 세대인 인상주의의 씨앗이 발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출처; 매일경제

[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낭만주의 선구자 들라크루아…죽음 앞에서 관능을 탐닉한 비운의 국왕 - 매경ECONOMY (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