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끔은 달달한 감상에 빠지고 싶기도 하고, 잠시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에서 헤어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말이다. 이 두 가지를 충족시켜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다.
2000년 왕가위(王家衛)가 감독하고 양조위(梁朝偉)와 장만옥(張曼玉)이 출연한 이 영화는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었고, 2000년 제53회 칸영화제에서는 남우주연상과 최우수예술성취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 홍콩영화평론학회상도 받았다. 한국에서도 2000년 10월 개봉했는데 흥행엔 별로 성공한 것 같지 않다. 2013년 재개봉도 했었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62년 홍콩. 그 당시 홍콩은 사회적으로 불안했다. 40년대 많은 중국인들이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20여 년 동안 비교적 평온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60년대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결론났다. 암울한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에서 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많은 상하이 사람들이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 물결에 홍콩사회도 잔뜩 긴장했다. 실제 1962년은 왕가위 감독이 홍콩으로 이주한 해다. 60년대 홍콩은 막 이주한 왕감독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낯설고 어수선한 도시인 것이다. 왕감독은 본토 상하이 생활 습관을 그대로 간직하여, 함께 밥도 먹고, 시시콜콜 옆집 일도 간섭하면서, 와글와글 살아가는 고향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화양연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줄거리는 이렇다. 1962년, 신문사 편집기자인 차우(양조위 분)부부는 상하이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 방 하나를 얻어 이사 온다. 바로 그날 리첸(장만옥 분) 부부도 옆 아파트 방을 얻어 이사 온다. 차우의 아내는 호텔에서 일하는 관계로 자주 집을 비운다. 리첸의 남편도 무역 회사에 근무하여 일본 출장이 잦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차우와 리첸은 자주 부딪치면서 가까워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배우자가 몰래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리첸은 사랑하는 남편의 곁을 떠나지 못하면서 실망하고, 슬퍼한다. 차우 또한 아내에게 분노하면서도 리첸을 위로하며 서로 조금씩 마음을 나누게 된다.
‘화양연화’란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를 뜻한다고도 하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왕가위 감독이 제목을 ‘화양연화’라 붙인 이유가, 말 그대로 그녀의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그렸기 때문일까?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고 그녀의 마음 또한 아름다웠긴 하지만, 왕감독은 ‘영화’에게 격(格)을 부여하여 영화 그 자체를 ‘화양연화’라 부르고 싶었을 거라고 본다. 영화 곳곳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아름다운 순간순간이 바로 ‘화양연화’라고 부를 만 하지 않을까? 이 영화 자체가 ‘화양연화’라고 생각하는 몇 가지 매력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매력은 빼어난 영상미다. 무채색에 가까운 배경화면으로 도드라진 리첸의 모습은 장면 하나하나가 작품사진이다. 빛과 어둠의 조화속에 화면은 느리게 흘러가기도 하고, 때론 정지한 듯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아주 세밀한 부분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사소한 소품에 집중하기도 한다. 때때로 빛은 그녀만을 포착한다. 어둡고 정적인 배경 속에서 리첸은 한줄기 빛이다. 고통스러운 빛. 고통에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빛.
두 번 째 매력은 영화 전체에 걸쳐 느린 화면과 더불어 등장하는 배경 음악이다. 일본 첼리스트 Shigeru Umebayashi가 연주한 Yumeji's Theme는 리첸과 함께 천천히 흘러간다. 그 묵직한 선율은 리첸의 모습을 따라가며 그녀의 마음을 대변한다. 리첸은 지나치게 구슬픈 선율에 자신을 맡기며 애초에 사랑이 없었던 ‘무’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음악으로 인해 관객이 주인공의 마음을 공유했다면 성공!!! 그 다음 인상에 남는 곡은 거의 마지막 후반부에 Nat King Cole이 부른 'Quizas, quizas, quizas'다. '아마도' ‘어쩌면’ 이란 뜻의 ‘Quizas’ 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항상 난 그대에게 묻곤 하지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대는 늘 내게 대답합니다. 글쎄요... 아마도,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게 날들은 지나가고 나는 절망에 빠져갑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대답합니다. 글쎄요, 아마도.. 그럴 수도 있겠지요.” 리첸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노래 가사가 그녀의 맘을 대신해줄 뿐이다. 대화 없는, 답답하다 싶은 지루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라틴 탱고풍의 Quizas 가락은, 톡톡 튀는 실로폰 같은 타악기의 경쾌함까지 더해져 영화를 쓸쓸하지 않게 마감해준다.
세 번째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의상이다. 리첸은 늘 중국전통의상 치파오를 입고 나온다. 치맛자락이 깃발처럼 날린다는 치파오(旗袍)는 엉덩이 아래부터 양 옆선이 치맛단 끝까지 터져 있는 옷이다. 리첸이 이 영화에서 입은 치파오는 홍콩의 유명한 장인 작품이라고 한다. 리첸은 26벌의 치파오를 바꿔 입고 나온다. 다음 장면 치파오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할 정도로 때론 섹시하게... 때론 우아하게.... 아름다운 곡선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치파오는 긴 목과 단아한 어깨, 가는 허리를 가진 늘씬한 장만옥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네 번째 매력은 절제의 미다. 이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대화가 적어진다.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웃음조차 모습으로 대신한다. 아래로 향한 눈길과 조용한 몸짓, 주변의 단순한 소리들이 대화와 감정을 대신한다. 리첸은 이별의 순간 조차 가녀린 체구에서 격하게 품어져 나오는 소리 없는 눈물로 흘려보내고 허공을 쫓는 침묵의 건조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둘 간의 인연이 끝났음을 암시하며 자막이 올라온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차우는 자신의 소심한 사랑을 앙코르와트의 구멍 속으로 밀어 넣고 메워버린다. 차우의 심정을 자막이 대신한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은 희미하게만 보였다." 그렇게 사랑도, 즐거움도, 슬픔도, 아픔도 그저 없었던 것처럼 둘은 멀리서 추억으로 서로를 지운다.
화양연화는 작년 BBC가 선정한 '21세기 세계 100대 영화'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작품성에서 인정받은 영화다. 한국영화 두 작품도 100위 안에 들었다. 하나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로 30위다. 다음은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 66위다. 둘 다 블랙리스트다.
이 영화의 평은 대체로 일관된다.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멜로 영화에 멜로가 없다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3번을 보고 나서야 그 진가를 알아봤다고도 한다. 대체적으로 지루함만을 빼면 최고라는 평이다. 나는 이 영화를 4번 봤다. 흔치 않은 줄거리에, 음악에, 영상미에, 치파오 패션쇼에 빠져.... 4번째도 지루한 줄 몰랐다. 5번째는 무엇에 빠져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까?
이상, 출처; 한겨레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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