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여백을 발견하는 소설
세계를 발견해가는 방법으로 소설 읽기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소설의 언어는 비유적이다. 다양한 수사적 표현과 상징 구도를 채용함으로써 소설의 언어는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복잡하고 다채로운 의미의 군락을 구축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소설의 이야기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층적으로 해석된다. 독자는 그 속에서 공감의 요소를 찾아 감정적으로 공유하게 되고, 어느 순간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상상적인 경험 세계로 들어간다. 이른 바, 간접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을 읽는 일은 누군가의 한 생애를 살아보는 일과 같다. 한 사람의 삶보다 여러 사람의 삶을 경험할 때 세상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교묘한 문장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서사가 아니라 문장으로만 구성된 것 같은 낯선 형식은 이 소설에서 시간을 삭제해버린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 같다. 『설국』에는 한 남자와 두 여자가 등장하는데, 소설의 구도로만 보면 영락없이 통속적이다. 구도만 그런 게 아니다. 고마코라는 게이샤와 병든 남자를 간호하는 요코의 인물설정은 신파적이다. 당연한 것처럼 두 여자 사이에 시마무라가 있다. 그는 “가끔 서양무용 소개 따위를 쓴답시고 문필가의 말단에 끼”어 있는 남자로 물려받은 유산으로 무위도식하며 여행을 즐긴다.
『설국』은 표면적으로는 시마무라의 눈에 비친 두 여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한 겹 벗겨보면 두 여인의 형상화된 모습은 시마무라의 각기 다른 내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까닭에 『설국』은 시마무라가 고마코와 요코라는 상징적 거울에 비친 자신의 미의식을 탐색하는 심리소설로 읽힌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근거는 주인공 시마무라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도촌(島村). 왜 하필 고립과 단절의 공간인 ‘섬’을 주인공 이름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시마무라가 찾아간 온천 여관에서 그의 위치와 관련된다. 눈의 고장으로 불리는 그곳에서 시마무라는 외지에서 찾아온 손님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홀로 떠 있는 섬 같은 존재이다. 자의식을 찾아가는 소설이 그렇듯, 시마무라는 고립감 속에서 자신의 미적 감각에 눈을 떠간다.
그렇다면 시마무라가 탐색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마무라의 시선과 관련된다. 시마무라가 요코를 만나는 시점부터 이야기가 시작하면서, 이 소설은 시마무라와 요코 사이의 문제를 탐색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은 시마무라와 고마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요코는 고마코의 배경으로 가끔 등장할 뿐이다. 그럼에도 시마무라의 시선은 고마코를 지나 요코에게 머문다. 눈앞에는 언제나 화장으로 단장한 게이샤 고마코가 있지만, 시마무라의 시선은 고마코를 지나 ‘서늘하게 찌르는 듯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요코를 향한다. 이러한 구도는 동양적 미학을 자신의 소설론으로 삼은 작가의 미의식에서 비롯한다. 작가는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감추어진 여백을 들여다봄으로써, 인간 내면의 순정함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설국?을 읽는 방법으로 작가의 미의식에 초점을 둔 것은 이 작품이 창작된 시기와 관련된다. 이 소설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36세 되던 1935년에 발표한 단편 「저녁 풍경의 거울」에서 출발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저녁 풍경의 거울」에서 다루었던 소재의 연속성을 살려 연작 형태의 단편을 썼고, 오랫동안 수정 작업을 거쳐 1948년 12월에 『설국』 완결판을 내놓았다. 이 시기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군국주의 노선을 본격화한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 거쳐 태평양전쟁과 패전에 이르는 시기와 맞물린다. 전쟁의 폭력성은 지식인에게 인간성의 실종과 삶의 허무를 깨닫게 해주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기간에 발표한 작품들이 허무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게 된 것도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설국』에서 시마무라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위도식으로 온천 여행에 탐닉하는 것은 허무주의적 요소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게이샤 고마코의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화법이나 삶에 대한 건강한 시선이 이야기에 탄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설국』은 허무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본연의 생명력을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그동안 사람들은 『설국』을 이야기하면서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인상적으로 말해왔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 문장만으로 소설 전부를 말하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첫 문장 만큼은 어깨너머로 들어봤을 정도로 강렬하다. 글 쓰는 사람치고 이 문장을 흉내 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문장은 매력적이다. 첫 문장의 매력으로 『설국』을 읽기 시작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소설 자체는 생각만큼 흥미롭지 않다. 극적인 전개도 아니고 몰입하게 하는 갈등 구조도 없다. 1930년대 중반, 한적한 산골 마을의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몇몇 풍물이나 게이샤의 삶 말고는 눈길을 끄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설국』을 읽는 방법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설국』은 읽는 소설이 아니라 듣는 소설에 가깝다. 물론 이 소설은 순수하고 서정적인 묘사를 장점으로 삼고 있다. “옷깃이 들춰져 있어 등에서 어깨를 흰 부채를 펼친 듯하다. 분을 짙게 바른 살결은 어쩐지 슬프게 도톰하여 모직 천 같기도 하고 동물처럼 보이기도 했다.”처럼 고마코를 묘사하는 문장은 압도적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 소설은 시마무라가 보고 들은 것을 들려주는 것처럼 청각적 요소에 기댄 것 같다. 아마도 소설 앞부분에서 시마무라가 요코의 목소리를 이렇게 느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높은 울림이 고스란히 밤의 눈을 통해 메아리쳐 오는 듯했다.” 이 문장을 읽고 난 후, 『설국』은 ‘높은 울림’을 간직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후 전개되는 시마무라와 게이샤 고마코의 만남도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자기 내면의 소리를 울리는 쪽으로 전개된다. 서로에게 울림을 주기 위해 많은 말들이 오가지만, 두 사람은 끝내 공명(共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내내 숨겨두었던 비장의 카드처럼 진정으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로 소설을 끝맺는다. 고치 창고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가운데, 시마무라는 밤하늘 은하수를 올려다본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이 찬란하게 아름다운 밤하늘 풍경을 배경으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가 소리 없이 전개된다. 불이 난 고치 창고 2층에서 뜨거운 꽃잎처럼 요코의 몸이 떨어져 내린다. 시마무라의 눈에 그것은 “비현실적인 세계의 환영”처럼 보인다. 그 모습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상실해가던 인간성에 대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설국』을 읽고 난 후 머릿속에 비현실적인 ‘환영’이 남아 있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설국』이 감추고 있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매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출처; 전북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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