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릴케... 또...

BK(우정) 2020. 3. 2. 21:27

"그들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심장을 바늘로 찌르기 위해 왔다. 무슨 일이든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직성이 풀리셨던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확실하게 처리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 삶과 죽음의 존엄을 노래한 구도자


"어째서 당신은 신이 영원으로부터 오시는 분, 미래의 존재이자 나무의 마지막 열매이며, 우리는 그 나무의 잎새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전부를 품에 안기 위해서 신은 최후의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가는 그 분이 이미 계시다면 우리의 추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벌들이 꿀을 모으듯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가장 감미로운 것을 취하여 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낸 편지> 에서


독특하게 울리는 이름과 '장미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이라는 상투어로 우리에게 알려진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가 의문시되던 20세기 초의 급변하는 시대를 살다간 시인이었다. 시문학사에서 그가 세운 공적은 기념비적인 것이지만 릴케는 일찍부터 자질을 발휘한 세칭 '천재'는 아니었다. 그의 문학 세계는 끊임없는 노력과 연마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자신의 삶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투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1875년 12월 4일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의 독일인 지역에서 태어난 릴케의 어린 시절은 현실을 외면한 채 과거의 귀족적 생활을 동경하는 어머니와 퇴역 하사관이었던 아버지 슬하에서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릴케의 관심은 문학에 있었지만, 아들을 통해 자신이 못 다한 꿈을 실현시키려는 아버지의 강요에 따라 릴케는 군사학교에도 다녀야 했다.


스무 살에 릴케는 프라하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미술사 등을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문학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프라하 시절에 쓴 시들은 대부분 일시적인 감정을 토해낸 것에 불과하며, 언어의 음악성에 대한 감각이 돋보였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그는 뮌헨으로 건너와 두 학기를 마치고, 철저히 시 창작에만 전념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옮겨간다.


◇ 전환점을 맞는 릴케


뮌헨에 체류하는 동안 릴케는 덴마크 작가 옌스 페터 야콥센과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의 만남을 통해 문학과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차례 번역 소개된 바 있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야콥센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1899년과 1900년 루 살로메와 함께 했던 두 차례의 러시아 여행은 젊은 릴케가 시인의 사명을 새롭게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농부 시인 드로스힌과의 만남을 통해서 릴케는 서구문명에 물들지 않은 채 광대한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근원적 삶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형상은 그의 문학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원형으로 자리잡게 된다.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하여 브레멘 근교에 정착했던 릴케는 아내의 스승이던 오귀스트 로댕의 전기를 쓰기 위해 1902년 파리로 이주한 후 또 한 차례 중대한 전환을 맞는다. 로댕의 예술을 접하면서 릴케는 주관적 감수성에 의존했던 이전의 태도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를 시도하게 된다. 이제 릴케의 문학은 주관성을 배제하고 개별 사물 대상이 시의 중심에 놓이는 이른바 '사물시'의 시기로 열리는 것이다.


대도시 파리에서 릴케가 마주한 것은 자연성을 상실한 대도시의 비참함과 혼란이었고, 그 자신도 정체성의 혼란 등 실존적 위기를 체험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보는 법을 배운다'는 명제는 이 시기 릴케의 문학과 삶의 모토가 됐다. 그러므로 릴케의 사물시는 19세기 이전 시대의 시인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본'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세계의 본질 파악을 목적으로 한다. 관찰된 대상은 단순하게 재현된 객체가 아니라 우리에게 더 높은 인간 삶의 방식을 지시하는 상징으로 의미되는 것이다.


1902년부터 1908년 사이에 쓴 시들은 <신시집>과 <신시집 별권>으로 출간됐다. 이 시집들과 함께 파리 시절 릴케의 또 하나 위대한 성과물이 바로 산문으로 씌어진 <말테의 수기>다. 릴케는 이 작품에서 기존 소설 문학이 사용하던 연대기적 서술방식을 포기하고 주인공의 상상, 기억의 단편들을 주관적 언어로 엮어낸 독특한 양식을 시도함으로써 현대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


◇ 자기만의 길을 걸었던 구도자 릴케


릴케의 삶에는 중요한 여성들이 몇 있는데, 릴케 후기에 후견인이 되었던 마리에 폰 투른 운트 탁시스 부인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이 귀족 부인의 배려로 릴케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두이노 성에서 머물게 되고 1912년 바로 이 곳에서 걸작 <두이노 비가>가 시작된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중단됐던 <두이노 비가>는 10년 후인 1922년에 릴케의 마지막 정착지인 스위스의 뮈조트에서 완결됐다.


<두이노 비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삶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존재 전체를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찬미하는 노래다. 릴케는 <두이노 비가>에서 사물시의 창작 방식을 다시 뛰어넘었다. 사물시에서 대상이 고립적으로 관찰되었다면 여기서는 모든 대상들이 유장한 언어 속에서 정돈되어 더 한층 높은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이노 비가>가 완성된 그해에 릴케는 또 다른 대작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탄생시켰다. 그리스 신화의 시인 오르페우스의 형상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과 예술을 테마로 다룬 이 작품은 가히 릴케 시문학의 총결산이라 해도 손색없다.


두 개의 대작을 남긴 후 1926년 12월 29일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릴케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뮈조트와 발몽의 요양소에서 자연을 벗삼아 조용히 보낸다. 이 마지막 해에 릴케는 다시 순수 서정의 세계로 돌아가 대부분 짧고 운율에 맞는 자연시와 시적 명상들을 남겼다. 세기전환기의 혼란과 제 1차 세계대전 등 역사의 격동기를 살면서 릴케는 세태와 타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거부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걸어간 시인이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시를 통해 존엄한 인간 삶의 회복을 탐색했던 그에게서 우리는 한 사람의 시인을 넘어선 진정한 구도자의 모습을 본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나, 말테 라우리츠 브릭게. 어릴 때는 행복했다. 덴마크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랐으니까. 하지만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고, 지금 나는 혈혈단신으로 파리에 흘러 들어왔다. 내게 남은 것이라곤 끔찍스러운 고독과 가난뿐이며, 혼란스럽고 낯선 대도시의 환경은 나를 끊임없이 불안에 떨게 한다. 쓰고 싶은 글도 못 쓰고 일찍 죽게 될까봐, 삶이 무의미하게 끝나게 될까봐, 나는 무섭다.

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살아야 하는데... 아아, 나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상, 출처; 동아닷컴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10328/7668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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