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여행, 어디론가

역사

BK(우정) 2019. 5. 4. 18:02

신한촌;

 

경술국치후, 일제강점기에 자리잡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한인 집단거주 구역.

해외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로, 신개척리로도 불렀으며

1911년 무렵에 형성, 1937년 한인강제이주 때까지 존재했다

현재는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과거의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 블라디보스톡에는 1870년대부터 한인이 집중하기 시작해

1891년에는 840여 명에 이르렀으며, 시 당국에서는

1893년 한인들의 집단 거주 구역을 설정하였다

‘카레이 스카야슬라보드카(한인촌)’ 혹은 ‘개척리’라 부르던

이 지역은 신한촌 성립 이전 한인집단 거주지로

비교적 시내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1911년 제정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기화로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하고 이 일대를 기병대 숙소로 삼았다

새로 이주한 곳은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산비탈로,

높고 건조하며 아무르만을 굽어보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이에 다시 땀을 흘려 신개척리와 석막리를 건설하고,

새로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을 지닌 ‘신한촌’이라 명명하였다

1915년에는 신한촌의 한인수가 무려 1만 명에 달하였다

 

신한촌은 단순한 한인 집성촌만은 아니었다

서북간도 및 연해주 한인 사회를 배경으로 건설된 신한촌은

항일민족지사들의 집결지였고,

나아가 국외독립운동의 중추기지로 발전하였다

 

이곳으로 망명, 활동했던 인물로는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이진룡 등의 의병장을 필두로 하여

국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망라되었다

헤이그 특사인 이상설, 이위종을 비롯하여

북간도에서 민족 교육을 하던 이동녕, 정순만

미주에서 공립협회와 국민회를 조직·활동하던

정재관, 이강, 김성무 등이 이곳에 집결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신민회를 조직, 활동하던 안창호를 비롯해

이종호, 이갑, 조성환, 유동열 등도 이곳으로 왔다

그 밖에도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 신채호도 합세했으며,

기독교계의 이동휘와 대종교의 백순 등을 비롯한

애국계몽운동자들도 연이어 집결하였다

이 항일민족운동가들은 한인 사회의 지도급 인물들인

최재형, 최봉준, 문창범, 김학만 등과 협력하여

1910년대 국내외 독립 운동을 주도하였다

 

신한촌 내 설립 단체들을 살펴보면;

권업회는 신한촌 건설과 같은 시기인 1911년에 조직되어

3년여에 걸쳐 유지되었고, 조국독립을 위한 계몽활동,

민족주의 교육, 농상공업 등 실업 권장을 통해

한인사회의 정치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면서

독립전쟁론을 실현하는 것을 최고 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독립전쟁론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1914년에 대한광복군정부가 조직되었고

이는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 부통령으로 각각 선출하고

국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대한광복군을 양성하여

강력한 항쟁을 개시하였다

 

아울러, 개척리에 있던 계동학교를 확대, 개편한

한민학교가 건립되어 민족주의 교육에 공헌하였는데,

이는 2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양옥의 대형교사를 신축

연해주 민족주의 교육의 본산이 되었다

신한촌 외곽에는 조선사범대학, 원동종합대학 등이 있어

한인 자제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와 함께, 신한촌민회라는 자치기구가 결성되어

한인 사회의 자치를 신장시켜 나갔다. 

 

신한촌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던 항일민족운동도

1914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러시아의 탄압을 받아

이후에는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북간도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1937년 극동 한인의 강제이주로 신한촌이 폐쇄될 때까지

이곳에서의 한인 활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일제는 신한촌 외곽 약 1km 지점에 영사관을 두고

항일민족운동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비록 1920 4월에는 일본군들에 의해

잔인한 학살만행이 자행되는 등의 슬픈 역사도 있지만,

1937년 강제이주 이전까지 변함없이

극동지역의 항일운동 및 한인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해나갔다 

 

 

신한촌기념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신한촌에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신한촌도 사라지게 되었고,

1999 8월 한민족 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곳을 기리기 위해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는 3개의 큰 기둥과 8개의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비에는 ‘민족의 최고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정신이며.. '

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역사/BK

 

부끄러운 역사, 자랑스러운 역사

모두 교훈이다

 

실패한 경험, 성공한 경험

모두 교훈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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