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하며 살았던 적이 별로 없다. 마스크를 쓰라 하면 마스크를 쓰고 사람 많은 데 가지 말라 하니 웬만하면 안 가려고 한다. 팬데믹이라는 위기상황이니만큼 나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그리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정부의 부탁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입이 쉬질 않는다. 그런데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고 있으니 투자를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권고에 대해서는 어떤가? 누가 어디에 아파트를 샀는데 얼마가 올랐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심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정부의 권고는 모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 권고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몹시 모순적이다. 하나는 목숨이 오락가락 할 수 있는 일이니 시키는 대로 따라야 옳고, 다른 하나는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평생 목돈을 잡아보는 일은 물 건너갈테니 정부 정책과는 반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일까?
생활방역 수칙이나 부동산 투자에 대한 정부의 권고는 모두 합리적인 미래 예측에 기반한 것이다. 전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의 권고를 따르려 애쓰는 이유는 그것이 과학적 지식에 기초해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과학적 지식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 투자나 위험도가 큰 주식 투자에 대한 경고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이해해야 옳다. 나의 투기적 행위가 시장을 교란하고 결과적으로 나의 이웃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는 그저 투자에 실패했다고 격리되지는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태도에는 사뭇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래서 뜬금없이 묻게 된다. ‘과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지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까?
뉴턴이 천상계의 운동과 지상의 운동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한 이래 자연의 법칙은 현상이 왜 그런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넘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하게 해 주었다. 이탈리아의 현자 파레토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 전에 아담 스미스의 후예들이 믿었던 것처럼 인간사라고 해서 그런 법칙들이 없을까. 우리가 그런 법칙을 발견해 내기만 한다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확실히 자연과학은 사회과학에 뚜렷한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듯이 사회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는 믿음이 팽배했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20세기 인류 스스로가 저지른 거대한 폭력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지만, 그 원대한 꿈이 그렇게 쉽게 사그라질 리는 없다. 생태 위기와 환경 위기 앞에서 새로운 계몽주의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그것은 과학적 지식에 기초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종내 비닐하우스로 변한 지구에서 살아야 할 것이고, 생태계의 수많은 종을 공룡의 위패 옆에 모셔야 할 판이다. 그래서 에드워드 윌슨 같은 과학자는 인류의 미래를 인류 스스로가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과거 사람들이 철학적 담론이나 문학적 상상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오늘날에는 과학이 새로운 철학이자 새로운 문학이 되었다. 차이는 과거의 철학적 담론이 관념의 논리에 충실했다면, 과학은 사실의 논리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과학은 사실에 기초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주려고 한다.
근대 과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목적론적 설명방식을 포기하고, 인과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과학은 오직 측정할 수 있는 사실만을 믿고,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가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그러나 이제 과학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답을 말하려 한다면, 근대 과학의 그 금과옥조를 어겨야 한다. 근대 과학이 선을 그었던 가치의 영역에 발을 들여야 하며, 그 순간 과학은 근대의 낡은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런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가치이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 가치인지를 과학은 대답해 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자유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평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조사할 수는 있겠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를 과학이 결정해 줄 수 있을까? 과학적 사실에 기초한 판단과 행동 전략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절이다. 그래서 더더욱 협업과 융합이 필요해 보인다. 인간은 사실만으로는 살지 않아 보이니까.
이상, 출처; 대학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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