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는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누가 무엇을 언제 발견했다는 기록이다. 언뜻 생각하기엔 여기에 뭐가 어렵고 복잡한 게 있을까 싶다.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고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것처럼 모든 게 명쾌해 보인다.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한 경우가 많다. 과학적 발견의 경우 발견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기체를 발견했다는 건 어떤 기준으로 정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은 특정 기체를 성공적으로 분리해냈는가 여부이다. 둘째는 그 기체의 화학적 성질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는 그 기체의 화학적 정체성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셋째 기준은 그 기체를 발견자가 새로운 기체로 규정하는가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발견을 공공연하게 발표하거나 최소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화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체였던 산소를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분리해낸 것은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1742~1786)였다. 셸레는 어릴 때 약국 견습생으로 일했으며 거의 독학으로 화학을 연구했다. 셸레는 44세의 짧은 생애 동안 타르타르산, 벤조산, 시트르산, 젖산, 요산 등 수많은 산(acid)들을 분리했다.
시안화수소산과 최근 일본의 반도체 관련 수출규제로 유명해진 불화수소(플루오르화수소), 황화수소산 등 독성이 강한 산도 제조했다. 셸레는 자신이 다루던 화학물질을 모두 냄새 맡고 맛보던 습관이 있어서 그 때문에 일찍 사망한 것으로 (결혼한 이틀 뒤에) 추정된다. 셸레가 산소를 분리해 낸 것은 1771~1772년 무렵이다. 그러나 셸레는 산소를 새로운 기체라기보다 공기의 특정한 상태로 이해해 ‘불의 공기’라 불렀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셸레는 산소가 있으면 불이 잘 탄다는 성질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셸레도 기본적으로 플로지스톤의 패러다임 속에서 산소를 이해했다. 즉, 불의 공기는 플로지스톤을 잘 끌어내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불의 공기가 있으면 나무속의 플로지스톤에 더 잘 나온다. 그 결과 불이 더 잘 붙는다.
안타깝게도 셸레의 성과는 1777년에야 뒤늦게 발표됐다. 인쇄소의 실수도 한몫을 했다고 한다. 산소 발견자로 더 유명한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1733~1804)가 산소를 발견한 해가 1774년이다. 그러니까 셸레는 산소를 따로 포집하고 기본적인 성질까지 연구했으나 새로운 기체로 인식하지 못했고 또한 공식 발표마저 늦었다.
영국의 프리스틀리는 성직자이면서 영국 왕립학회 소속의 화학자로 당대에 가장 ‘잘 나가던’ 과학자였다. 프리스틀리는 1756년 에든버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주변 과학자들의 권유로 전기현상을 실험했다. 이때 프리스틀리는 전기력도 중력과 마찬가지로 역제곱의 법칙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이 공로로 1766년에 왕립학회 특별회원으로 선출된다. 전기력의 역제곱 법칙을 실험적으로 확인하고 공식화한 것은 1785년 프랑스의 샤를 드 쿨롱이었다. 전기력에 관한 역제곱 법칙은 쿨롱의 이름을 따서 쿨롱의 법칙이라 부른다.
이후 1767년부터 1773년까지 프리스틀리는 리즈에서 예배당 목사로 일했다. 이 ‘리즈 시절’에 기체와 관련된 연구를 시작했다. 마침 근처에 양조장이 있었는데 발효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그 정체는 이미 블랙이 밝힌 바 있다.)를 수상치환법으로 포집해 성질을 연구하던 중 이산화탄소가 녹은 물맛이 청량감을 높여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것이 현대적인 탄산음료의 시초였다.
프리스틀리가 분리한 기체는 10종에 이른다. 일산화탄소, 암모니아, 염화수소, 이산화황, 아산화질소 등이 포함된다. 아산화질소(N2O)는 보통 ‘웃음가스’로 알려져 있다. 흡입할 때 얼굴근육에 경련이 일어 웃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아산화질소는 마취효과가 있어 의료용 마취제로 쓰이기도 한다. 특히 치과에서 어린이용으로 사용된다. 향이 달콤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풍선에 아산화질소를 넣어 ‘해피벌룬’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환각작용 때문이다. 물론 위험한 행동이다. 중추신경마비나 호흡기 이상증세가 올 수 있다. 아산화질소는 휘핑크림을 만들 때도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피벌룬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자 2017년부터 환각물질로 지정해 함부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프리스틀리의 모든 과학 활동의 정점은 역시나 산소의 발견이다. 1774년의 일이다. 프리스틀리는 먼저 수은을 가열해서 붉은 수은재(HgO·산화수은)를 얻었다. 여기에 돋보기로 햇빛을 비추자 수은재가 다시 수은으로 돌아가면서 어떤 기체가 발생했다. 프리스틀리는 이 기체를 모아 그 성질을 연구했다. 이 기체는 양초를 더 잘 태우는 성질이 있었다. 또한 밀폐된 공간의 쥐 같은 동물이 숨을 더 잘 쉬게 해준다. 그러나 프리스틀리는 당대의 대다수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플로지스톤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 기체를 공기의 특정한 상태로 파악해 ‘탈폴로지스톤 공기’라 불렀다. 영어 접두사 ‘de'는 ’없는‘, ’결핍된‘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탈플로지스톤 공기란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라는 뜻이다. 프리스틀리는 왜 자신이 발견한 새 기체에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양초에 불을 붙이면 양초에 풍부한 플로지스톤이 공기 중으로 빠져나온다. 이것이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설명하는 연소과정이다. 만약 양초가 밀폐된 유리병 속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양초에서 나온 플로지스톤이 얼마지 않아 유리병 속의 공기 안으로 다 스며들게 된다. 즉 유리병 속의 공기는 플로지스톤이 완전히 포화된 상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양초 속의 플로지스톤이 더 이상 공기 속으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 결과 촛불이 꺼진다.
여기서 유리병 마개를 열면 다시 촛불이 타오른다. 밖에서 새로 들어간 공기가 양초 속의 플로지스톤을 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깥의 공기 대신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새 공기를 넣어주면 촛불이 훨씬 더 잘 타오른다. 이 말은 양초 속의 플로지스톤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새로 발견한 공기는 플로지스톤을 훨씬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는, 즉 애초에 ‘플로지스톤이 결핍된 공기'라고 유추할 수 있다!
세상에는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잘못된 이론으로도 아주 그럴 듯하게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다. 산소를 발견하고도 탈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정체성을 고수했던 프리스틀리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산소를 발견하고도 그 정체성을 몰라본 프리스틀리를 산소의 발견자라고 불러야 하나 하는 딜레마에 슬쩍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산소 발견에 기여한 공로를 모른 체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어차피 산소라는 기체의 정체성을 잘 몰랐다면 스웨덴의 셸레는 단지 발표가 조금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산소 발견자 명단에서 빼야 하나 싶기도 하다. 이처럼 과학의 역사에서는 누가 무엇을 발견했다는 언명이 그리 간단하게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산소 발견의 마지막 주인공은 프랑스의 앙투안 라부아지에(1743~1793)이다.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소속의 화학자로서 영국의 프리스틀리처럼 수은재(산화수은)로부터 어떤 기체를 분리해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번번이 실험은 실패였다. 그 와중에 바다 건너 프리스틀리가 새로운 기체를 분리(1774)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해에 프리스틀리가 파리를 방문했는데 그때 라부아지에에게 자신의 실험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프리스틀리의 도움으로 라부아지에는 이듬해인 1775년 마침내 산소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라부아지에가 셸레나 프리스틀리와 달랐던 점은 플로지스톤 이론 속에서만 머물지 않고 산소를 완전히 새로운 기체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산소’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라부아지에였다(1779). 산소(oxygen)라는 말 자체가 '산(acid)을 만들어내는(gen) 기체'라는 뜻이다. 당시 라부아지에는 모든 산(acid)에 산소가 포함돼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라부아지에는 공기가 서로 다른 종류의 두 기체가 1대4의 비율로 섞여 있음을 알아냈다. 산소가 공기의 약 20%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정황적으로 헨리 캐번디시 등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캐번디시 또한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산소를 공기의 어떤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기체로 규정했기 때문에 전에 없던 새로운 연소이론이 필요했다. 라부아지에가 플로지스톤 이론에 회의를 품은 것은 그가 당시 정량화학의 정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1772년에 이미 라부아지에는 황의 연소과정에서 반응 뒤 질량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연소 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이든 뭐든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수돼야만 한다. 그 정체가 바로 산소였다. 라부아지에는 또한 연소와 동물의 호흡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규명했다. 석탄을 태우면, 즉 석탄이 산소를 흡수하면 열이 방출된다. 동물이 체온을 유지하는 것도 호흡 과정을 통해 산소를 흡수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서 열을 내는 게 아닐까?
라부아지에는 기니피그를 이용한 실험에서 호흡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조사해, 같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는 숯의 연소과정에서 나오는 열량이 기니피그 호흡 때 나오는 열량과 비슷함을 알아냈다. 이로부터 라부아지에는 호흡이란 반응이 느린 일종의 연소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포함한 동물의 생체작용도 기본적으로는 열기관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1786년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연소이론을 정리한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 이론을 극복하고 연소란 산소와의 결합과정임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던 1789년,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총망라한 《화학원론》을 출판했다. 이 책은 말하자면 라부아지에 생애가 담긴 역작이다. 제목에 ‘원론’을 넣은 이유는 《화학원론》이 저 유명한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원론》과 마찬가지로 화학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학원론》은 화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책이다. 이 책에서 라부아지에는 연소이론을 새로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주기율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원소표를 제시했고 우리에게 익숙한 화합물의 명명법을 창안했다. (화합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이름을 이용한 명명법은 이미 1787년 라부아지에가 동료 화학자들과 함께 과학아카데미에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또한 화학반응 전후의 질량보존의 법칙을 명확하게 정의했고 물리학에서처럼 방정식을 도입해 화학반응을 표기했다.
라부아지에의 한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그의 원소표에는 훗날 화합물로 밝혀진 물질들도 있었고 빛과 열의 원소에 해당하는 광소와 열소(caloric)도 포함돼 있었다. 열소는 질량이 없는 입자로서 열소의 흡수와 방출로 열 현상을 설명한다. 이처럼 조그만 입자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태도는 뉴턴의 유산이라 볼 수 있다. 19세기에 고전역학이 완성되면서 빛의 본질은 전자기 파동이고 열은 분자의 운동에너지임이 밝혀진다. 광소나 열소는 없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라부아지에는 《화학연보》라는 학술지를 창간하는 등 하나의 독립적이고 체계화된 분야로서의 근대적인 화학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로 과학혁명을 완성했듯이 라부아지에는 《화학원론》으로 화학혁명을 완성했다.
《화학원론》이 출간된 해가 1789년이면 프랑스 대혁명의 폭풍을 라부아지에는 어떻게 맞이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생긴다. 프랑스 대혁명 같은 민중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체로 비슷해서 민초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가 공통적으로 작용한다. 민초들이 고통 받는 이유 중에도 또한 동서고금이 비슷한 요소들이 있다. 엄청난 세금이다. 18세기 프랑스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세금은 징세청부조합이 왕을 대신해서 세금을 걷었다. 사설업체가 세금을 걷는다는 구조를 생각해 보면 어떤 부당한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업체는 왕에게 갖다 줄 액수만 맞추면 된다. 그걸 초과하는 징수분은 그대로 업자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업자는 업자대로 자신의 징세지위를 누리기 위해 온갖 로비를 다했을 테니 돈이 많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일선에서 직접 세금을 걷는 일에 최적화된 조직은 바로 깡패들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업무는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이른바 ‘용역깡패’를 떠올려 보면 그림이 나온다.
라부아지에는 1768년에 징세청부조합의 지분을 3분의 1이나 인수해 조합의 중책을 맡았다. 중책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일을 하지는 않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화학연구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라부아지에는 별 생각 없이 재산증식을 위해 재테크 수단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1771년에는 조합장의 딸이던 14세 연하의 마리 폴즈와 결혼도 했다.
이쯤 되면 대혁명으로 바스티유 감옥이 프랑스 민중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세상이 라부아지에에게 적대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특히 1793년 1월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얼마 뒤 로베스 피에르 주도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로 보내졌다. 10월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됐다. 그해에는 과학아카데미도 폐쇄됐다. 이듬해인 1794년 5월 8일 28명의 세금 징수관이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걸린 시간은 불과 35분이다. 세 번째 처형자는 라부아지에의 장인이었고 네 번째 처형자가 라부아지에였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조세프 루이 라그랑주는 절친한 사이였던 라부아지에를 구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허사였다. 라그랑주가 들을 수 있었던 말은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였다고 한다. 절망에 빠진 라그랑주가 라부아지에 처형 다음날 남긴 유명한 말도 아직 전해지고 있다.
“그의 머리가 잘린 것은 한순간이지만 저런 똑똑한 머리를 만드는 데에는 100년이 걸려도 불가능하다.”
이상, 출처;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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