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분노의 포도... 또...

BK(우정) 2020. 3. 3. 09:29

봄에 이어 지난주에 연구차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대학에 다시 왔다. 이 대학에 오면 떠오르는 미국 작가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이다. 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살리나스에서 태어나 여기 스탠퍼드대학을 다녔다. 대학 교지에 글을 쓰는 등 문학수업을 받았지만 학위를 받지는 않았다. 스타인벡은 고향인 캘리포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들에 즐겨 담았다.

“서부의 여러 주들이 새로 일고 있는 변화에 격동하고 있는 것이다.

텍사스와 오클라호마, 캔자스와 아칸소,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캘리포니아가 그렇다.

한 가족이 그들의 토지로부터 옮겨가고 있다.

아버지가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그런데 그 은행에서 이제 토지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스타인벡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의 한 구절이다. 소설은 오클라호마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일자리를 찾아온 톰 조드 가족의 삶을 다룬다. 이 작품이 크게 주목받은 이유는 대공황기의 미국 사회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데 있다.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밀려나온 노동자들의 생존 투쟁을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로 묘사한다. ‘기회의 나라’인 미국 사회의 이면을 생생히 조명한 이 소설은 스타인벡으로 하여금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했다. 


<분노의 포도>는 오클라호마에서 시작하지만 캘리포니아가 주요 무대다. 캘리포니아는 오랫동안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낙원의 하나로 꼽혀 왔다. 따뜻한 엘 에이(LA)를 꿈꾸는 더 마마스 앤 더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이나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라고 노래한 스캇 맥킨지의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느낄 수 있듯이, 캘리포니아는 햇볕과 활기와 평화를 상징해 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가 언제나 살기 좋은 낙원은 아니었다.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면 이곳에도 빛과 그늘이 존재했다. 그 어두운 그늘을 날카롭게 그린 대표적 소설이 <분노의 포도>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구했다 하더라도 턱없이 낮은 임금은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지 않는다. 또 농장주들의 교묘한 책동은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고단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집단적 대응인 파업의 중요성을 서서히 깨달아 가는 게 <분노의 포도>의 줄거리를 이룬다. 

< 분노의 포도>가 발표된 1939년 당시 미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대공황 이후의 대규모 실업 및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루스벨트 정부는 뉴딜정책을 추진해 사회통합을 모색했고, 또 나름의 성취를 일궈냈다. 루스벨트 정부의 개혁정책이 전후 미국 사회의 발전은 물론 캘리포니아의 번영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 셈이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이러한 분노의 폭발이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이후 지난 몇 년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크게 확산돼 왔다는 점이다. 2011년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구호로 시작된 일련의 점령 시위는 그 분노의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이 분노의 한가운데는 다름 아닌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초국적 금융자본이 놓여 있다. 전 지구를 넘나들며 탐욕스럽게 이익을 챙겨온 금융자본은 ‘20 대 80 사회’를 넘어서 ‘1 대 99 사회’를 만들어 왔고, 치명적인 경영위기에 처해도 공적자금을 통해 회생함으로써 이른바 대마불사(大馬不死)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사회 양극화는 이제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정책적 현안이 됐다.

문제는 상황이 이러한 데도 그것을 해결할 주체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융부문이 고장 나 있다면 처방을 제시하고 치유를 강구하는 게 무엇보다 국가에 부여된 일차적 과제다. 하지만 정작 국가는 금융부문과의 긴밀한 인적 네트워크로 인해 통제 수단을 이미 상실하고 있거나 금융자본이 마련한 배당의 잔치에서 말석을 차지해 왔다. 반복되는 금융위기에 적극 대처하라는 ‘국가의 귀환’, ‘초국적 케인스주의’, 그리고 글로벌 거버넌스에 대한 요구는 빈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점령 시위가 놓인 곳은 바로 여기였다. 점증하는 빈부 격차와 사회 양극화, 증가하는 실업률과 감소하는 일자리, 어느 나라에서나 관찰되는 1% 강자와 99% 약자로 이뤄진 분열된 사회는 결국 시장의 횡포와 국가의 무능에 대한 시민의 분노를 일거에 폭발시켰다. 불황일 땐 세금으로 불패를 구가하고 호황일 땐 자기들만의 뻑적지근한 잔치를 벌이는 것에 대해 시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비록 점령 시위는 좌절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구 자본주의의 우울한 풍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낭패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서린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의 포도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충만하고

그 포도 수확기를 위하여 알알이 더욱 무겁게 영글어 가는 것이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스타인벡은 사랑과 연대의 새로운 발견을 강조한다. 그는 전통적 사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랄프 에머슨, 헨리 제임스, 월트 휘트먼 등 전통적인 미국 사상가들로부터도 영감과 통찰을 가져왔다. 소설은 아이를 사산한 샤론의 로즈가 굶주린 남자에게 젖을 먹이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데, 스타인벡은 타자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자각에서 새로운 희망의 단서를 찾고자 한다.


이상, 출처; 주간경향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310151900411&code=116



'알고 살아가자 > 사람과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0) 2020.03.03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0) 2020.03.03
분노의 포도  (0) 2020.03.03
존 스타인벡  (0) 2020.03.03
수상록  (0) 2020.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