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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이야기~

BK(우정) 2020. 1. 19. 09:46

1633년 6월 종교재판을 받은 뒤 로마의 메디치 저택에 며칠 연금됐던 갈릴레오는 7월 초 거처를 다시 시에나로 옮겼다. 시에나는 피렌체에서 약 50km 남쪽에 있는 도시이다. 갈릴레오는 친분이 있던 피콜로미니 대주교의 저택에 12월까지 머물렀다. 시에나에 있는 동안 갈릴레오는 새로운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대화》로 곤욕을 치렀던 위인이 또 다른 저작을 쓰겠다니, 꼭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이는 이미 칠순이고 종교재판을 전후해서 기력이 무척 쇠약해진 상태이기도 했다. 그나마 시에나에서의 생활이 갈릴레오에게 활력을 준 것은 분명했다. 피콜로미니 대주교는 원래 갈릴레오와 가까운 사이였고 갈릴레오가 자신의 저택에 머무는 동안 각지의 지식인들을 초청해 서로 교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갈릴레오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피렌체의 자택이 있는 아르체트리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634년 가을부터 갈릴레오는 새로운 저작인 《새로운 두 과학에 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이하 두 과학)》을 쓰기 시작했다. 《두 과학》은 한 마디로 역학교과서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최초의 근대적인 과학교과서라 불린다. 실제 《두 과학》에는 정말 수학교과서처럼 각종 기하학적 그림과 정리, 증명, 문제 등이 자주 나온다. 《두 과학》에는 세 인물인 살비아티, 사그레도, 심플리치오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나흘 동안 진행되는 토론 형식으로 짜여있다. 첫째 날에는 고체의 강도, 둘째 날에는 원기둥과 각기둥의 강도와 크기 비율에 따른 강도, 셋째 날에는 자유 낙하하는 물체의 운동, 넷째 날에는 투사체의 운동을 다룬다. 인간과 같은 모습의 거인이 왜 역학적으로 불가능한가 하는 재미있는 논의가 둘째 날 토론에 포함돼 있다. 


역학문제에 대한 갈릴레오의 고민이 시에나 시절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이미 피사대 때부터 갈릴레오는 역학문제를 연구했다.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 일화가 있을 정도다. 피사 시절 갈릴레오는 역학연구 결과를 정리해 《운동에 관하여(De Muto)》라는 책을 썼다. 물론  이 책이 출판된 것은 갈릴레오 사후였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실험을 했다는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갈릴레오가 피사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다녔고 피사대 수학교수로도 일했으니 피사의 탑에 올라가기야 했겠지만 직접 낙하실험을 하지는 않았다는 게 과학사학자들의 공통된 정론이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실험을 했다는 일화는 그의 제자였던 빈센초 비비아니가 훗날 스승의 전기에서 소개했다. 하지만 정작 갈릴레오 자신의 저작에는 이런 실험을 했다는 말이 없다. 오히려 네덜란드의 사이먼 스테빈과 드 흐로트가 1586년 델프트의 신교회에서 낙하 실험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10m 상공에서 질량이 10배 차이나는 똑같은 크기의 물체를 떨어뜨려 두 물체가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갈릴레오는 사고실험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거운 물체는 무거움이라는 본성을 쫓아 지구중심으로 향하고 가벼운 물체는 가볍다는 본성을 쫓아 천상으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그 결과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이었다. 갈릴레오의 사고실험은 아주 간단하다. 만약 가벼운 물체와 무거운 물체를 하나로 묶어서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 가벼운 물체는 위로 향하려고 하니까 아래로 향하는 무거운 물체를 위로 들어 올리는 효과가 있다. 즉, 무거운 물체는 같이 묶여 있는 가벼운 물체 때문에 혼자 자유낙하할 때보다 더 천천히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두 물체를 한데 묶었으므로 전체적으로 각각의 물체보다 더 무거워졌다. 따라서 각각의 물체를 떨어뜨릴 때보다 더 빨리 떨어져야 한다. 이는 가벼운 물체에 묶인 무거운 물체가 더 천천히 떨어진다는 앞서의 진술과 모순된다. 따라서 가벼운 물체든 무거운 물체든 똑같이 떨어져야 한다! 갈릴레오의 이런 추론은 《두 과학》에 잘 묘사돼 있다.  

 

이 사례는 사고실험의 위력을 잘 보여준다. 더불어 갈릴레오가 왜 근대과학의 아버지인지 그 면모도 여실히 보여준다. 사고실험은 현대의 물리학자들도 즐겨 사용한다. 예컨대 블랙홀과 관련된 많은 논의들은 주로 사고실험으로 진행된다. 왜냐하면 블랙홀로 직접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스티븐 호킹이 블랙홀에서의 정보손실 문제를 제기하고 수십 년 동안 논쟁이 진행된 것도 사고실험 덕분이다.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초기 불확정성 원리 등을 옹호했던 보어와 여기에 반기를 든 아인슈타인의 불꽃 튀는 논쟁 또한 사고실험으로 진행되었다. 사고실험은 과학적 사고의 축약된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위인이다. 가벼운 물체와 무거운 물체를 묶는다는 발상으로 2천 년 가까이 인간 사고를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볍게 무너뜨렸다. 


갈릴레오의 또 다른 사고실험으로 빗면실험이 있다. 이 사고실험에서는 U자형으로 양 끝이 휘어져 있는 빗면의 한쪽 끝에서 공을 굴리는 실험이다. 공은 빗면을 굴러 내려와 바닥을 지나 반대편 빗면을 타고 올라갈 것이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대담한 가정을 도입한다. 그의 사고실험에서 마찰을 없앤 것이다! 현실에서는 마찰이 없을 수 없다. 갈릴레오가 사고실험에서 마찰을 배제한 것은 일종의 추상화 과정이다. 운동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비본질적인 요소를 없애야 한다. 갈릴레오의 추론은 이러했다. 마찰이 없다면 빗면의 한쪽 끝에서 출발한 공은 다른 쪽 빗면을 타고 올라가 원래 빗면과 똑같은 높이까지 이를 것이다. 여기서 반대편 빗면을 조금 수평방향으로 눕히더라도 공은 원래 출발선과 똑같은 높이까지 올라갈 것이다. 대신 빗면이 완만해진 만큼 공은 똑같은 높이까지 올라가기 위해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하게 될 것이다. 반대편 빗면을 점점 더 수평에 가까이 눕히면 공은 출발선과 똑같은 높이까지 올라가기 위해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할 것이다. 만약 반대편 빗면을 완전히 수평으로 눕히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무한히 먼 곳에서 빗면이 위로 솟아있다고 가정할 수 있으므로 결국 공은 무한히 먼 곳까지 굴러갈 것이다.

 

그러니까 마찰이 없다면 빗면을 굴러 내려온 공은 가만히 내버려둬도 무한히 멀리 계속해서 굴러갈 것이다. 이 결과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관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강제적인 운동이 일어나려면 접촉기동자가 있어야 한다. 즉, 공이 평면을 굴러가려면 사람이 계속 발로 차든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굴러가던 공은 얼마지 않아 멈춘다. 갈릴레오의 사고실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접촉기동자가 없어도 공은 계속 굴러간다! 이것이 바로 관성이다. 갈릴레오는 빗면 사고실험을 통해서 관성의 법칙을 발견한 셈이다.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뉴턴의 관성의 법칙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갈릴레오에게는 원운동이 자연스런 운동이었던 만큼 그의 관성도 ‘원형 관성’이었다. 갈릴레오에게 수평운동이란 둥근 지구의 지표면을 따라가는 수평운동이었다. 원운동은 운동의 방향이 계속 바뀌므로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가 변한다. 속도는 크기와 방향을 모두 포함하는 물리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턴역학에서는 원운동이 속도가 변하는 운동이다. 갈릴레오는 속도의 크기, 즉 속력에 주목했다.

 

갈릴레오는 자유 낙하운동이 시간에 따라 속도가 일정하게 증가하는 등가속운동임을 알았고 이때 물체의 이동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함을 알아냈다. 실제로 갈릴레오는 빗면을 이용해 이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빗면을 이용하면 등가속운동이라는 수직낙하 운동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시간이나 거리측정을 쉽게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큰 물통에 물을 담고 아래쪽에 작은 관을 달아 그 관으로 흘러나오는 물의 양을 이용했다. 이 결과를 투사체, 즉 비스듬히 쏘아올린 물체에 적용하면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투사체 운동은 수평운동과 수직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마찰이 없다면 수평운동은 속도가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되는 운동이므로 이동거리가 시간에 정비례한다. 반면 수직운동은 아래쪽으로 가속도를 받는 등가속운동이다. 갈릴레오는 이 둘을 조합해 투사체의 운동궤적이 포물선임을 알아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관에서는 투사체의 궤적이 사뭇 다르다. 가령 야구공을 비스듬히 위로 던지면 야구공은 처음에 사선으로 강제적인 운동을 하고, 강제적인 운동이 끝나면 지구를 향하는 본성적 운동을 한다. 그 결과 야구공의 궤적은 직각삼각형이 된다. 투사체의 대표적인 사례가 포탄이다. 포탄의 궤적이 직각삼각형인지 포물선인지는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두 과학》은 이탈리아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네덜란드의 레이덴에서 1638년 출판됐다. 또한 토스카나 대공에게 헌정되지 못하고 로마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노아유 백작에게 헌정되었다.《대화》로 종교재판까지 받았으니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집필 막바지에 갈릴레오는 거의 실명 상태여서 아들과 제자의 도움을 받아야했다. 《두 과학》이 출판되고 4년이 지난 1642년 1월8일 갈릴레오는 아르체트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아직 교회의 서슬이 퍼렇던 때라 갈릴레오의 시신은 정식으로 묻히지도 못하고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의 조그만 예배당 한 구석의 쪽방에 묻혔다. 지금도 이곳에는 갈릴레오 흉상이 벽면에 걸려 있다. 한참 뒤인 1703년에는 제자였던 빈센초 비비아니가 사망한 뒤에 갈릴레오 옆에 묻혔다. 그리고 1737년에 드디어 갈릴레오의 묘가 산타크로체 성당의 본당으로 이장해  제대로 된 무덤 속에 묻혔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12세가 피렌체 출신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이때 이장하는 과정에서 갈릴레오의 관 아래 맏딸인 마리아 첼레스테가 함께 묻혀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 부녀는 산타크로체 성당 본당의 왼쪽 뒤편에 함께 묻혀 있다. 갈릴레오의 묘지 맞은편에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묻혀 있다. 갈릴레오 묘지 위에 세워진 조각상의 오른손에는 망원경이 들려 있다. 이장할 때 갈릴레오의 척추, 치아, 오른손 엄지, 검지, 중지를 떼어 내 따로 보관했다. 피렌체의 명소인 우피치 미술관 바로 옆에 있는 갈릴레오 박물관에 가면 갈릴레오의 손가락뼈를 볼 수 있다. 


갈릴레오가 사망한 1642년 1월8일로부터 꼭 300년이 지난 1942년 1월8일 영국에서 태어난 또 다른 천재가 있었으니, 바로 스티븐 호킹이었다. 위대한 누군가가 죽은 지 얼마 만에 누가 태어났다고 하면 그 아기가 위대한 선현의 환생이거나 그 정기를 이어받고 태어났다는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예술 분야 등에서 이런 이야기는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하필 ‘과학’에서도 비슷한 말이 오가면 재미있으면서도 쓴웃음을 참기 어렵다. 스티븐 호킹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갈릴레오가 죽은 지 거의 1년 뒤인 1643년 1월4일 역시 영국에서 위대한 과학자가 한 명 태어났다. 예상했겠지만 아이작 뉴턴이다. 뉴턴이 나흘만 늦게 태어났어도 1월8일은 갈릴레오 사망-뉴턴 탄생-호킹 탄생이라는 거룩한 신화를 완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늘 남는다. 갈릴레오 묘지 맞은편에 묻혀 있는 미켈란젤로가 사망한 날은 1564년 2월18일로, 그가 죽기 사흘 전인 1564년 2월15일에 갈릴레오가 태어났다. 

 

이상, 출처; 동아 사이언스

http://dongascience.donga.com/news/view/32936